칸트의 자유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칸트의 철학을 보면 한용운의 시가 떠오른다. 한용운의「복종」과 칸트의 ‘자유’는 닮았다.
칸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성은 자유롭다고 단언한다. 이 선언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먼저 등장하지만, 이후 『실천이성비판』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순수이성비판』으로 대표되는 인식∙이론철학과 『실천이성비판』으로 대표되는 실천철학에서 이성은 모두 중대한 개념이다. 자유는 양 분야에서 모두 마룻돌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이론적인 측면에서 자유의 가능성이 논의되며, 이성은 자유로운 인식기관임이 밝혀진다. 이에 반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을 지닌 존재자가 응당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하는지 논의하며 그를 통해 자유의 존재가 확정된다. 어찌 보면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자유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양자 중에 먼저 논의를 시작할 텍스트는 『순수이성비판』이다. 여기서 “이성은 자유”라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은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 - 초월적 이념의 셋째 상충’부터다. 이율배반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로 정의된다. 이 단어는 칸트 이후에 본격적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서로 논리적이고 이론적 타당성이 충분한 두 명제 -긍정하는 쪽은 정립 명제가, 반대는 반정립 명제가 된다- 를 비교하며 사용된다. 칸트는 이러한 상황은 이성이라면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러한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다툼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며, 둘에 대한 화해를 시도한다.
셋째 상충에서 제시되는 자유에 대한 두 명제는 다음과 같다. 정립 명제는 “자연의 법칙에 있는 인과성은, 그로부터 세계의 현상들이 모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 또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이다. 이는 “자유는 있다.”로 요약될 수 있다. 반정립의 경우 “자유는 없다. 오히려 세계에서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법칙들에 따라 발생한다.”이다. 자유란 인과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계열을 시작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인간은 자유롭다는 사고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자.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해 보면 생선 가시처럼 목 안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인간으로서 폐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과성 개념은 자연 세계 안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또 우리 역시 자연에서 나고 사는 존재자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는 없다.”라는 반정립의 명제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반정립의 명제와 그의 체계는 자신 안에 독을 품고 있다. “자유는 없다.”라는 명제는 자기 모순적이다. 만약 우리가 그에 따라 모든 자유를 도려낸다면, 무한소급의 문제에 빠지기 때문이다. 무한소급이란 개념은 결과와 원인에 대한 연쇄가 끝없이 발생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즉, 자유가 없다면 최초의 원인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론을 구성하는 이유는 현상의 원인을 규정하기 위함이다. “자유는 없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이 명제는 제 1원인으로서 자연법칙을 상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제에서는 제1원인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없다.”는 자기 모순적인 명제다. 무한소급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라는 무의미한 답변뿐이다. “자유는 없다.”라는 명제는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영양가 없는 토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 1원인자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칸트가 자유를 “인과계열의 시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였음을 상기해 보자. 세계의 시초는 모든 인과계열의 시작점이므로 자유를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주장의 한계는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난다는 점과 제 1원인자를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정립을 완전히 포기할 순 없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것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유는 그럴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자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기실, 정립과 반정립의 다툼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칸트는 두 명제 간의 화해를 도모한다. 이를 위해 칸트는 우리의 육체가 존재하며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구분한다. 전자는 현상계로 명명된다. 후자의 경우 예지계라고 불리는데, 감각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로 초월적이다. 현상계에 자유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반면 예지계에서는 자유가 존재한다. 칸트는 인간이 선험적으로 지닌 인식기관인 이성이 예지계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성은 자유로우며, 인간 역시 어느 정도 예지계에 발을 들여놓은 존재이다.
칸트가 이성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말하기 위해선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기관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각각 감성, 지성 그리고 이성이다. 감성은 우선 수동적인 기관이라 더 이상의 설명은 제한다. 반면, 그는 지성과 이성 모두 자발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칸트는 지성이 자유롭다고 언급하진 않는다. 인식기관 중 오로지 이성만이 자유롭다. 이유는 무엇일까? 지성의 자발성은 제한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기능은 감성에서 얻은 자료들을 나름의 기준에 맞추어 통일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반면 이성은 순수한 형식으로서 완전히 자유롭다. 이성의 역할은 지성 -혹은 지성으로부터 산출된 인식인 경험- 으로부터 추리를 진행하고, 그것들에 어떠한 통일성이나 법칙 따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성은 자유롭다. 이렇게 자유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논증된다.
다만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유란 이론적이고 가설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될 뿐이다. 그것은 실증이 불가능하다. 즉, 아직 자유의 실재성은 논증되지 못했다. 이어서 논의할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화제는 자유며, 이는 머리말과 서문에서부터 긴요하게 언급된다.
『실천이성비판』에 대해 세밀하게 이야기하기 전에 상기해야 할 점이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책임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제도나 법 따위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상식으로 삼고, 그렇지 않다고 보이는 경우에만 예외 상황을 둔다. 책임이 없다는, 당연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 해 선악도 분별해 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악과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칸트 역시 『실천이성비판』에서 이러한 사실을 염두하고 있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전술한 대로 인간은 현상계에 실존하면서도 예지계에 속한 존재다. 선험적이고 자유로운 이성을 지닌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스스로가 새로운 인과계열을 창출해 낼 능력이 있음을 함의한다. 그리고 새로운 창출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발생한다.
칸트는 행위의 원인으로 인간 내부에 있는 의지를 지목한다. 이 의지란 어떠한 자연적 경향성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다른 요소에 영향받기도 한다. 그는 이성이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성의 능력은 인식론에서의 그것과 맥을 같이한다. 칸트는 자아와 의지를 지성에 위치시킨다. 즉 지성의 산출물인 경험을 -지성보다 더 상위의 기관인- 이성이 활용하고 규정하듯, 이성은 인간 내면 최상위의 것으로 지성에 위치한 자아와 의지를 규정한다.
의지를 규정하는 규칙 -의지의 원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을 칸트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준칙과 법칙이 그것인데, 후자는 이성에 의해 추리되는 순수한 형식이다. 반면 전자는 주관적이다. 준칙은 질료 -감성과 지성의 결과물- 이 포함된다. 칸트는 질료에 영향받는 실천원리는 결국 쾌락에 의해 이용될 것이라 경계한다. 그리고 쾌락에 의한 행위는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 자유로운 것이라곤 볼 수 없다. 반면 법칙은 자유의 결과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성의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법칙이 자율이라면 준칙은 타율이다.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법칙들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의 유일한 원리이다. 이에 반해 의사의 모든 타율은 전혀 책무를 정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무 및 의지의 윤리성 원리에 맞서 있다.” - 8, 정리 Ⅳ
칸트는 행위의 준칙이 항상 법칙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법칙이 준칙을, 준칙이 의지를, 의지가 행위를 규정한다. 이성이 지성을 지배하는 이러한 과정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칸트는 스스로가 수립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실천적인 자유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용운의 「복종」과 칸트의 ‘자유’는 닮았다. 한용운이 당신이 칸트에게는 이성인 셈이다.
물론 칸트가 자유를 실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성이 자유를 요구한다고 보았다. -최소한 칸트가 생각한-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실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은 자신의 경험들을 통해 추리를 진행할 수도 없고, 법칙을 부여할 수도 없으며, 행위의 귀책도 따질 수 없다. 상기의 까닭에 이성은 스스로의 자유를 요구한다.
칸트의 철학에서 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그 답은 칸트의 철학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어떠한 행위에도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또 선도 없다. 그러한 존재는 아무런 존엄성도 없다. 하지만 자유를 가진 존재자라면 말이 다르다. 그들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또 그 가치는 숭고할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존엄하다. 이러한 답변은 2024년에도 유효하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자유가 어떠한 개념인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자유가 이론적, 또 가설적으로 다뤄진다. 우리는 자유의 존재 여부에 대해 한쪽 의견만을 선택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란 자연 세계-현상계- 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는 존재한다는 식으로 결론지어졌다. 칸트는 인간을 인과성에 지배되는 자연 세계와 자유로운 예지계에 중첩된 존재로 파악한다. 그런 까닭은 이성의 존재 때문이다. 이성은 법칙의 탐구자이며, 부여자이기도 하다. 그러한 연유로 칸트는 이성에 따르는 것이 곧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의 철학에서 자유란 법칙수립자로서의 자유임과 동시에 복종자로서의 자유기도 하다. 복종에 의한 자유는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최고의 자유기도 하다. 한용운이 시를 통해 그러했듯, 자유를 통해 복종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정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그렇기에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자유 앞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지만, 부자유 앞은 악 뿐이다.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