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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해석의 이론과 이해의 예술』서평

실존이란 해석이다.

by 새현

“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석학은 이에 대한 대답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해석학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논할 필요가 있다. 해석학은 본래 철학적 분과는 아니었다. 단지 성경을 읽기 위한 기술이었을 뿐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 활동한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의 기초를 놓는 동시에, 해석학의 영역을 성격에서 텍스트 전체로 확장한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번역하면서 얻은 고민과 사유들이 있다. 그가 서거하였을 즈음에 태어난 딜타이는 해석학의 기초를 보다 확실히 다진다. 두 철학자를 고전적 해석학자, 낭만적 해석학자라고 묶어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은 텍스트라는 장막 뒤에 있는 저자의 고정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곧 독해의 목적이라는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20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가다머와 프랑스의 폴 리콰르는 달랐다. 이들은 텍스트와 저자의 의도, 독자 모두가 분리된 것으로 파악한다. 해석이란 이 저자, 작품, 독자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낭만적 해석학자들이 저자를 고정된 축으로 보았다면, 20세기의 두 철학자는 텍스트를 고정된 축으로 삼았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근거를 둔 객관적인 이해를 통해 인식지평을 넓히는 일이 해석학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이렇게 가다머와 폴 리콰르는 현대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전통-이 둘에 의해 해석학은 진정으로 새로운 지적 전통이 되었다.- 확립시켰다. 해석학이라는 신전은 이 둘이 떠받들고 있는 셈이다.


애석하게도 해석학은 오늘날 철학적 주류라고는 할 수 없다. -너무 최근에 나온 체계라 그런 것도 있지만- 철학사 책 대부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영미분석철학에 덩치로 밀리고, 예술의 영역에서도 프랑스의 해체주의자들에 비해 아직 영향력은 부족한 듯도 하다. 해석학은 과소평가 되어 있다. 필자와 같은 문인들에게 해석학은 눈여겨봐야 할 분야다. 해석학의 중요성은 곧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이러한 사실이 철학의 주된 소재가 된 것은 20세기였다. 언어 뭉치인 텍스트를 주된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현대해석학의 탄생은 그 이후이다. 인류는 어째서 우리가 학문과 의사소통의 기초로 사용하는 언어를 고찰해야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뒤늦게나 깨달은 것일까? 학문의 기본 재료인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전까지는 왜 숙고해보지 않았을까? 비탄스러운 일이다.




『해석학:해석의 이론과 이해의 예술』(이하 『해석학』) 은 해석학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의 전략은 주제별로 장을 할애하는 것이다. 논의의 순서는 1장 언어, 다음으로 번역, 자기 이해, 해석학의 실천지다. 저자인 이기언 교수는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였고, 해석학의 거두인 폴 리쾨르에 대해 깊은 소양을 지녔다. 실제로 한국 폴 리쾨르 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책은 가다머와 폴 리쾨르를 중심으로 특히 후자를 설명하는데 방점이 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인 5장은 폴 리쾨르에게 헌정된 것처럼 읽힌다. 낭만적 해석학자들 역시 책에서 다뤄지나, 비교적 짧게 언급된다. 이에 대해서는 책을 읽기 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해석학자로서의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를 궁금해하는 사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하에서는 각 장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1장 언어와 이해

이 장에서는 해석학의 대상이 언어임을 선언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의 지위다. 확실히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최소한 해석학에서 만큼은 언어는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사고와 존재 증명 모두가 언어를 통한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완전히 찬성할 순 없지만- 인간의 사고는 언어를 통해 이뤄지며, 언어를 통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언어는 존재 양식이다.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했던 가다머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 이윽고 그는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라고 선언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인간의 도구로 취급되어 왔다. 가다머는 이러한 위계는 뒤집는다. 그는 언어에 놀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놀이에 몰입한 인간은 무아의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놀이의 주체는 참가자들이 아니라, 놀이다. 이기언 교수는 축구의 주체는 축구 선수나 관객이 아니라 축구공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의사소통도 일종의 놀이로 본다면, 인간이 언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인간을 말하는 셈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대화를 하며 상대의 저의를 읽어 내려다가, 혹은 단정지었다가 낭패를 보기 일쑤다. 섣부르게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기보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건전한 대화의 방법이다. 애시당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언어 뿐이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해석은 텍스트를 통한 대화다. 물론 차이는 존재한다. 텍스트의 대화는 해당 텍스트와 텍스트가 진행한다. 질문 역시 텍스트 안에 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텍스트 안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을 찾아내고 연결하는 과정이 바로 가다머가 말하는 해석이다. 이를 통해 해석학은 인간 존재에 있어 언어가 가지는 지위를 명확히 드러내는 동시에, 해석의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란 드러내는 동시에 숨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변수가 없다면 세상살이는 얼마나 무료할까?- 그렇기 때문에 가다머는 말한다. “이해한다는 건 늘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은 폴 리쾨르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2장 번역, 언어의 손님맞이

번역과 해석학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돌아감이 필요하다. 그 돌아감은 텍스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리쾨르는 텍스트를 “글쓰기로 고정된 모든 담화”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의 장단은 무엇인가? 리쾨르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텍스트는 저자로부터 분리되고 자립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낭만적 해석학자들의 견해와는 상반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텍스트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즉 텍스트의 가질 수 있는 의미는 한정된다. 반면 텍스트를 저자와 독립된 개체로 파악하게 된다면 그것의 의미는 보다 풍부해진다. 왜냐하면 저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풍부한 의미와 인식 지평을 획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죽어야 작품이 산다. 최초의 해석학자인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점을 간과한다. 그는 문자적인 번역보다 저자의 의도에 맞는 번역을 주문한다. 그러한 주장에 가다머와 리쾨르는 크게 반발한다. 번역자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의 의향을 파악해야 한다. 더불어 그에 따른 번역을 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 해석학의 견해다.

해석학은 번역이 동시에 이해임을 지적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은 몰이해가 있는 곳에 위치한다고도 말한다. 지당한 말이다. 당연하게도 번역자는 우선 텍스트를 독자로써 이해해야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은 텍스트의 부분은 전체를 통해, 전체는 부분을 통해 이해함을 통해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번역의 결과물은 부분과 전체가 상호 일치해야 한다. 부분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곧 전체가 드러나며, 전체를 파악함으로써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벌 번역을 한 후에 반드시 다시 읽어보고 보강해야만 한다. 번역의 순환, 전체에 대한 이해와 부분에 대한 이해의 순환. 이상의 것들이 해석학적 순환이다.


또 현재 철학자들이 -리쾨르, 가다머뿐만 아니라 움베르트 에코, 벤야민등등…….,-은 좋은 번역을 위해선 완벽한 번역을 포기해야한다고 말한다. 문자에는 고유한 표현이 있기에 모든 낱말을 기계적으로 직역한다고 좋은 번역이 될 순 없다. 약간의 의역이 있더라도, 그것이 설령 오역으로 평가받게 되더라도 번역자는 텍스트의 의향에 걸맞은 동시에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만 한다. 번역이란 이해를 통한 재창조다. 완벽한 번역이란 환상이다.


3장 텍스트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텍스트를 무엇으로 정의할지는 윗 장을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텍스트란 “글쓰기로 고정된 모든 담화”다. 사실 이 장의 핵심 -제목과는 다르게도- 은 텍스트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읽을 것이냐? 에 대한 대답, 즉 해석과 해석학을 설명하는데 중점이 있다.


해석학의 배경에는 의도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의도주의란 -마치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가 그렇듯- 문학의 의도와 작가의 의도가 일치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작가전기적비평 -사실 비평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이나 구비평과도 맥이 닿는다. 반면 해석학은 비의도주의에 해당한다. 의도주의를 비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방법들이 실제로 『해석학』에서 많이 다뤄진다. 다만 필자는 비의도주의가 의도주의에 가지는 우월성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의도주의는 텍스트의 가치를 유한하게 만든다. 반면 비의도주의는 텍스트를 저자와 독립시킴으로써, 텍스트가 가진 무궁한 가치와 무한한 비밀을 캐낼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비의도주의적 관점은 실제로 더 현실성 있다. -마치 반증주의보다 패러다임론이 더 현실성있는 것 처럼-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수천 년동안 우리에게 읽힌다. 그 세월동안 수 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새롭게 해석되었다. 가령,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같은 개념으로 말이다. 소포클레스가 수천 년동안 후를 예상하며 의도를 설정할 수 있을까? 의도주의는 이러한 현상을 상상할 수도, 가정할 수도 없다.


구비평을 비판한 많은 사람들과 20세기의 두 해석학자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언어 현상은 작가를 추방시킨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것은 작가라기보단 언어 그 자체다. 또 그 언어들은 단순한 낱말 뭉치가 아니다. 낱말들이 쌓이고 결합됨으로써 텍스트는 의미를 넘어선 어떠한 의향과 함의를 가진다. -누군가는 이것을 내적 역동성이라고 지칭한다- 독자가 이해해야 할 것은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의 유일한 방법론은 택스트 내에서 질문을 활성화하고, 텍스트 내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가다머는 작품을 읽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텍스트 내의 인과관계, 즉 구조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해석이다. 해석이란 텍스트가 열어젖힌 문을 따라 걷는 것으로, 즉 함의를 발견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전자의 방식, 즉 구조주의와 어느 정도 선을 긋는다. 반면 리쾨르는 “더 많은 설명이 더 나은 이해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제 다음의 문제는 텍스트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이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텍스트란 자립해있다는 점이다. 자립해있다는 뜻은 곧 그것이 주체임을 함의한다. 가다머는 이 주체성을 존중하라고 말한다. 바로 텍스트가 말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러하여 해석학은 객관적인 학문이다. 해석이란 텍스트의 내에서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는 점에서 ‘개인의 행위’ 일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행위이다. “텍스트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작가와 분리되어 있고, 독자가 모든 비밀을 알아낼 수도 없다.


텍스트의 함의란 독자가 텍스트에 부여한 의미들의 퇴적물이다. 즉 해석에 있어서 독자의 권위는 저자의 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판이다. 텍스트가 독립된 주체임을 가정한다면, 해석이란 곧 타자에 대한 이해다. 또 이러한 타자 이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함양한다. 따라서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


4장 자기 이해의 문제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 현대 이전의 해석학은 단지 읽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즉 그들은 단지 하나의 기예를 연마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국민은 하이데거의 전후로 뒤바뀐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존재와 언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언급한다. 가다머와 리쾨르는 이러한 관점을 채택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환은 리쾨르에게 있어서 특히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리쾨르 철학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주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가? 그는 데카르트와 칸트, 후설 등을 자신의 대결자로 설정한다. 이들은 자아를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리쾨르는 그렇기 때문에 세 철학자가 실패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했지만, 자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리쾨르는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탐구하기 위해선 빠른 길이 아니라 에움길을 통해야 한다고, 오히려 에움길이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리쾨르가 말한 에움길이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선 삶의 자료들을 해독해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사고를 통해 존재를 추론했지만, 이는 잘못이다. 존재는 사고에 선행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아란 고립된 주체다. 반면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내-존재임을 지적한다. 쉽게 풀어쓰자면, 개인은 주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계망 속의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기를 표출한다. 언어란 존재의 양식이다. 리쾨르는 ‘나는 말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라는 두 명제는 서로 순환논증을 이룬다고 비판한다. 또 세계와 인간 역시 동시에 탄생하며 순환한다. 이러한 리쾨르의 주장은 모순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리쾨르는 이렇게 항변한다. 데카르트의 순환논증은 황량할 따름이지만, 자신의 순환논증은 서로를 풍족하게 하는 선순환이라고.


확실한 것은 데카르트, 칸트, 후설 등을 체계는 자기 이해에 있어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있어서 리쾨르의 체계는 확실히 강점이 있다. 리쾨르는 현존재의 자아는 삶을 해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자아란 해석된 존재인 셈이다. 즉 자기 삶을 표현하는 방법은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된 존재가 바로 실존의 양식이다. 그렇다면 자기 이해를 위한 매개자로는 무엇이 있을까? 리쾨르는 세 가지를 지목한다. 각각 기호와 상징, 텍스트다. 기호는 곧 언어다. 상징은 비유적 의미와 문자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며, 여러 중첩된 뜻을 내포한다. 마지막으로 텍스트는 앞의 두 가지 수단을 모두 포괄한다. 또 그것은 일종의 배움인데, 아주 특별한 배움이다. 전술하였듯 텍스트는 타자다. 우리는 그 타자를 읽고 해석하고, 자신과 비교한다. 이러한 배움은 분명 외부에서 온다. 하지만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외부적인 지식만을 얻지 않는다. 해석의 과정 자체가 곧 ‘나’를 형성한다. 타자를 통해 자아의 풍족함을 얻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텍스트가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주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계를 자기화하는 과정이 곧 자기 이해다. ‘나’에게서 벗어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격이다.


5장 자기 해석학의 실천지

현대해석학은 실천철학이다. 이 바탕에는 하이데거의 사상이 있다. 크게 보자면 세 가지 논제가 그러한 지반을 구축한다. 1, 존재는 언어다. 2,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간접적으로 자기를 이해한다. 3. 현상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언어 역시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가다머는 목표를 실천지에 두었다. 즉 그는 자신의 해석학을 통해 실천지를 산출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기안 교수는 가다머의 체계에 실천의 문제는 그저 주변부에 있을 따름이라 지적한다. 오히려 자기 이해의 해석학, 즉 자기 해석학이라고 불릴 만한 철학을 한 것은 리쾨르다.


리쾨르는 데카르트 등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자아 인식 대신 우회로를 통한 자기 인식을 권한다. 최소한 자기 이해에 있어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우회로가 바로 해석이다. 리쾨르는 ‘자기’란 해석된 존재라고 밝힌다. 하이데거가 세계와 외부 현상 따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기를 인식했다면, 리쾨르는 그 간접적 매개로 텍스트를 강조한다. 텍스트를 통한 자성과 비판이 곧 자기표현이다. 이는 해석과 재창조이며 실존의 양식이다. 리쾨르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는 순환논증일 뿐 아니라, 사고가 존재보다 선행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중대한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사고는 존재를 뒤따라온다. 더불어 후설의 자아개념은 직관에 호소하는, 즉 의심스러운 것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보면, 해석학은 실존의 분석론이라고 부를 만하다. 언어를 통해 지금 존재하는 나를 분석해 내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텍스트 중에서도 문학, 특히 소설을 자기 이해를 위한 수단으로 주목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리쾨르는 텍스트가 열어젖히는 세계를 인식하는 일이 해석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점에서 소설은 장점이 있다. 리쾨르는 소설이 상상력의 실험실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설은 삼인칭이라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일인칭화자라고 하더라도, 쓰여진 언어 자체는 삼인칭이다. 해석이란 텍스트를 자기화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정립하는 과정이다. 이보다 더 실천적인 일이 있는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나’가 목마른 사람이라면 천천히 소설과 친해져 보는게 어떨까?




『해석학』의 저자인 이기안 교수는 본래 불어불문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가다머 -셋은 모두 독일인이다.- 보다는 리쾨르에 대한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어떤 독자에겐 아쉬운 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쾨르가 가장 최근까지 살아서 철학을 하였음을 고려해 본다면, 또 그가 해석학자 중에서는 가장 방대한 분야를 포괄하였음을 상기한다면 이는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기안 교수는 우리에게 가장 최신의 지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기안 교수는 300쪽도 되지 않은 분량에 수많은 예술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인용과 다양한 참고문헌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책은 재료를 아끼지 않은 텐동처럼 작은 그릇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풍성함을 보여준다. 재료를 아끼지 않는 텐동처럼 말이다. 『해석학』에는 해석학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와 현상학도 꽤 중요하게 다뤄지며, 이 외에도 프랑스의 해체주의자들과 데카르트, 칸트, 후설 등도 긴요하게 언급된다. 이런 방식의 단점은 텍스트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후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 책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기안 교수는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책의 전반적인 맥락을 파악하는데 전혀 어렵지 않도록 글을 썼다. 더불어 일상적인 비유와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감을 통해 책의 재미 역시 살렸다. 즉 철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해석학』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텍스트에 있어 풍부하고 재미는 대개 반비례하곤 한다. 하지만 이기안 교수는 그러한 법칙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읽는 쪽이든 쓰는 쪽이든, 문학인이라면 -리쾨르는 소설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자신의 관심을 철학에 녹여 내었다- 꼭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발견되고, 독자는 텍스트를 통해 자신을 이해한다. 이러한 과정은 깊이에 있어서, 또 넓이에 있어서 서로를 확장시킨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이 아닐까? 필자 역시 『해석학』덕에 해석학적 순환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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