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 3주마다 나는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에 종이봉투를 버린다. 생활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나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그럴 때마다 봉투를 손에 든 채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 질량의 쓰레기면 괜찮아, 스스로 변명한다. 내가 버리는 건 약 봉투다. 천장에 붙은 CCTV는 여전히 돌고 있고, 나는 영원히 정신병자일 테고, 또 출근을 해야 한다. 나의 병력은 가족들도 모른다. 아, 죽고 싶다.
그날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전화가 왔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눈에 익은 번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업무차 온 전화일 가능성이 있다.
"여보세요?"
"***맞니?"
수화기 너머에선 중년남성으로 추정되는 살짝 낮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그런데 상대방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네, 맞습니다."
"엄마 지인이야. 보험 때문에 전화했어."
"보험이요?"
의아함에 빠진 나와 달리 상대방은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안석환이고 한 **보험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름을 들어보니 언젠가 TV 광고에서 봤던 듯도 한 상호이었다.
"나이가 들면 보험료가 비싸지거든,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미리미리 보험 들어놓는 게 최고지. 그편이 훨씬 싸게 먹혀. 그래서 엄마가 나한테 좀 도와달라고 했어. 내가 보험사 직원이거든."
엄마는 또 나 모르는 사이에 일을 벌인 모양이다. 하여튼 오지랖은.
"그런데 최근에 병원 간 적 있니?"
"병원이요?"
"3개월 이내에 병원 진료기록이 있으면 보험 가입이 안 되거든."
가슴이 철렁했다. 본능적으로 파티션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누구는 협력사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누구는 화면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건 내가 바로 조회를 해줄 수 있어."
"......"
"조회해줄까?"
"제가 지금 근무시간이라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같은 직장인이라 그런지 상대방도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위기를 한 번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우선 안석환의 번호를 '보험사'라고 저장했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한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상상을 하니 벌써 마음이 초조하다. 우선 나는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할 때 마음이 가벼운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더 무겁다. 가슴 위에 무게추 몇 개를 더 올려둔 채 모니터 속으로 다시 고개를 박았다.
내가 먼저 엄마한테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먼저 통화했니? 하고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보험이야?"
나는 나의 불만이 말에 묻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내가 파를 가위로 썰 때 어머니는 보험은 젊은 나이부터 들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돈육이 84프로 함유된 햄을 썰어 프라이팬에 구울 때는 어쩌다 보험사 직원과 친해졌는지 장광설을 펼쳐놓았다. 나는 대답도 대꾸도 하지 않고 흘려들으며 저녁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자기도 이참에 보험에 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살림이 어려워 보험에 가입해 본 적도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도 살림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뭐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지긴 했다. 이젠 치킨도 가끔 시켜 먹을 수 있으니까. 좌우지간, 어머니에게 헛바람이 분 게 확실하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계속 쫑알거렸고, 덕분에 음식을 삼키는 일이 고역이었다. 나는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싱크대에 수저와 밥그릇을 넣고, 빈 밥그릇 안에 따뜻한 물을 채워넣었다.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내가 미리 말하면, 너가 바로 알겠다고 하겠니?"
또 이런 식이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린 앞으로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변덕이 심하다. 예전에는 이런 적도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돈이 없으니,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학원이니 학교니 다 그만두라고 했기에, 본래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버거킹에서 패티를 굽고, 감자튀김을 튀기는 일이었다. 엄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연이어 나에게 화도 내었다. 무슨 학생이 공부를 그만두냐면서 말이다. 그때 자기가 좀 화가 나 있어서 한 말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화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나는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버거킹 점장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 크게 곤혹스러워했다. 곤혹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속으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스탠드만을 켰다. 그리고 침대에 정자세로 눕는다. 남는 시간 대부분 나는 이렇게 누워만 있는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유튜브니, 넷플릭스니 볼 힘도 내게 남아있지 않다. 주말 근처의 영화관을 다녀오는 것만으로 기진맥진해지곤 한다. 그렇게 눈을 감고 가만 누워있으면 죽고 싶었던 때와 죽고 싶을 때가 머릿속에서 떠오르곤 한다.
내가 가장 죽고 싶었을 때는 16살 때였다. 나는 멀리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굳이 멀리 있는 학교로 가니?"
10년 넘게 부엌에 네 발로 서있는 식탁 앞에서 엄마는 말했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이다.
"....., 엄마도 왠지는 알고 있잖아."
"그래도 너무 멀어."
"그래야 걔내들을 안 만나지."
"원래 중학생 땐 다 그래. 고등학교로 가면 애들 머리도 더 커지고 철도 다 드니까 괜찮을거야."
"그게 딸한테 할 말이야?"
"엄마니까 하는 말이지 그럼."
엄마는 내내 심드렁하게 말했다. 부엌 불만 켜진 집이 어쩐지 깜깜하게 느껴졌다. 나는 냉장고에서 1.5리터짜리 생수병을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다 마시고 보니 꽉 차 있던 생수병은 3분의 2 이상이 비어져있었다. 목은 여전히 탔지만 배가 꽉 찬 기분 때문에 물을 더 마시진 않았다. 나는 결국 '걔내'들과 같은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
누군가 책상 위를 툭툭 두들겼다. 그제야 내가 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업무시간에 말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주름이 좀 있고 큼지막한 손이 하나 보였다. 익숙한 손, 부장님의 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부장님."
나는 허리를 다시 곧추세웠다. 부장님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김 대리, 요즘 좀 심하네.
"죄송합니다."
"자네는......, 아니다. 그 따위로 할거면 다 때려쳐."
부장님은 하던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뚜벅뚜벅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최근 기면증이 생겼다. 의사는 수면제에 내성이 생기면 흔히 오는 부작용이라고 말했다. 수면제에 내성이 생기면 약효가 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해가 뜨고 정신을 차리고 일해야 할 때 약효가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잠깐 약을 끊었을 때도 있었다. 약을 먹나 안 먹나 졸린 건 매한가지였기에 차라리 먹기로 결정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타자를 두들기다가 커피를 사 오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
'보험사'에서 다시 전화가 온 건 이틀 후였다. 나는 서늘한 복도 구석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세요?"
"통화 괜찮니?"
이 양반, 생각해 보니 시작부터 반말을 했다. 살짝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별수는 없다.
"네 말씀하세요."
"너 정신과 진료기록 있더라?"
"제 동의 없이 그런 거 조회해도 괜찮은 거예요?"
테이블 타이에 힘껏 묶이듯 가슴이 조였다. 그래도 호흡을 잡아야만 한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그 자체로 약점이다.
"어머니가 빨리 처리해달라고 하셔서."
이 씨발.
"혹시 무슨 이유로 진료를 본 건지 말해줄 수 있니? 가입에 꽤 중요한 부분이거든."
곧장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진단받은 병명들은 한 손으로도 다 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렁뚱땅 통화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찰거머리처럼 나에게 달라붙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질을 낼 수도 없다. 어머니가 나에게 지랄을 할 테니까.
"불면증이랑 뭐......, 그런거죠."
"그런데 이게 3개월 이내라서 당장 가입은 어려울 것 같아. 혹시 3개월 치를 한 번에 처방받는다거나 하지 않을래?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하면 해주실 텐데."
그 얘기를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린 나이에 벌써 수면제에 의지하는 건 안 좋은데......,"
중년의 남자 의사는 첫 1년 동안 수면제도 주지 않았다. 내게 항불안제와 약한 정도의 항우울제, 수면유도제를 처방 해줄 뿐이었다. 잘 맞는 약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약도 있었다. 어떤 약은 먹고도 두 시간은 뒤척여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내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의사가 약을 주기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 맞지 않는 약과의 작별은 반가웠지만, 잘 맞는 약과의 작별은 씁쓸하다. 이게 중독을 막는 방법이라고 그는 말했다. 약품 중독의 폐해, 수면제의 부작용 따위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말했다. 세상에는 어쩜 질리는 일투성이일까, 나는 속으로 되뇌곤 했다.
또 진료 때마다 의사는 내게 말했다. 잠에 드는 약은 습관성이 있기 때문에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가 없다고. 내가 약을 먹고도 잠에 문제가 있다고 한참을 호소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수면제를 처방받을 수 있었다. 부작용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고 꿈도 자주 꾸었다. 의사에게 말하니 내게 보조제를 하나 처방해 주었는데 꿈을 덜 꾸게 하고 중간에 덜 깨게 해주는, 즉 잠의 질을 높여주는 약이란다. 보조제를 먹자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어졌다. 알람을 들으면 재깍재깍 일어나던 나는 이제 없었고, 핸드폰을 멈추고도 20분 정도는 침대에 더 누워있어야만 하는 내가 있었다. 약기운 때문에 늦게 일어난 아침에는 이렇게 혼잣말하곤 했다. 아......, 미치겠네.
아, 미치겠네. 보험사 직원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잠이라도 잘 자고 싶을 뿐이다. 침대 위에서 두세 시간씩 뒤척이지 않고, 그렇게 뒤척이다가 가슴을 찢어버리는 생각들을 하지 않고, 이따금 영화관에 갈 수 있는 삶이면 그걸로 족하다. 한데 세상은 왜 내가 잠을 자는 것조차 방해하지 못해 안달일까?
"제가 지금은 근무 중이라 오래 통화는 어려워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결국 내가 선택한 건 또 회피였다. 부당한 일에도 말 한 번 못 할 정도로,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래도 가입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머니한테는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집에 돌아와 난 한숨을 덜었다. 그녀는 보험이나 정신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안석환이 엄마에게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고, 식은 밥을 랩에 씌운 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밥은 푸석푸석했고, 부들거렸을 어묵은 약간 딱딱했다. 나는 우적우적 음식을 씹어먹었다. 맛이 잘 느껴지진 않았다. 머리에 음식 말고 다른 생각들이 가득한 까닭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보험 가입을 거절한다면? 엄마한테 연락이 갈 것이다. 둘은 한통속이니까. 나는 엄마의 호통과 명령을 듣고 정신병원으로 가서 3개월 치 약을 조제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럼 의사는 이유를 물을 것인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고역이다. 3개월 동안 나의 잠자리도 편치 않아질 것이다. 나는 적당한 꾀병거리를 만들어 병원에 가기로 했다. 대충 두통이 있다고 하면 몸살약을 처방해 줄 것이다. 대강 계획을 짠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미각이 언제 이렇게 둔감해진 걸까?
회사 점심시간, 나는 급하게 근처의 병원에 다녀왔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이비인후과에는 나와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이 몇 명 앉아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나는 의사한테 말했다. 두통이 좀 있다고, 몸살이 난 것같다고. 의사는 체온계를 들이밀었다. 그는 열은 없네요, 라고 말하면서도 처방전을 한 장 만들어주었다. 나는 약국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채 끝나기 전, 나는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 오늘 병원을 갔다 와서 보험에 바로 가입하기 힘들 것 같아요."
"아 그러니? 마침 잘 됐네. 너희 어머니도 좀 더 생각해 보고 싶다 하셨거든."
"아, 그런가요? 몰랐어요. 이만 끊을게요."
'보험사'의 태도는 생각보다 쿨했다. 실적을 위해 어떻게든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그의 태도를 곱씹어보았다. 친한 사람은 친한 사람들 간의 예의가 따로 있다던데, 그런 이유에서일까? 하여튼 나의 예단은 틀렸다. 그리고 예단이란 보통 꼬일 대로 꼬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다. 정신병자들은 자신이 정신병자라는 걸 숨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처세술을 길러야만 한다. 회의실에서 손톱을 뜯고 싶어도 참는 법, 모임 자리가 싫고 그 안에서 우울해져도 내색하지 않는 기술, 무기력할 때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억지로 힘을 짜내는 방법 따위가 있다. 이제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가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최선을 다 하는 척을 해야만 한다. 그게 직업윤리이고 올바른 처세술이기도 하다.
*
"김 대리, 오늘 시제품 보러 가나?"
부장님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큰 소리로 말했다. 귀가 좀 아팠다.
"네, 이제 내려가 보려고요."
나도 마침 공장에 가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어서서 코트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최 사원 데리고 가. 같이 가서 이것저것 좀 알려주고."
"최 사원이요? 네, 같이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최사원은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이다. 우디한 향수를 뿌려대는데, 사회 초년생이라 그런지 적절한 양을 모르는 모양이다. 여하튼 나는 최 사원을 데리고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거기엔 회사 명의로 된 자동차 몇 대가 줄지어 서 있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운전석으로 향하던 최 사원을 물리쳤다. 원래 운전은 상사가 하는 거야, 말한 후 운전석에 대신 올랐다.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고 클러치를 밟으면 차의 엔진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기지개를 켜는 차와 달리 내 몸은 여전히 졸려 했다, 오히려 차에 타기 전보다 더 피곤해졌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제가 운전할까요?"
내가 하품을 하자 최 사원이 물었다. 나는 커피마시면 괜찮아요, 라고 말했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오피스가 들어찬 대로는 차들로 꽉꽉 막혔다. 시내에서 벗어나면 더 답답하다. 서울과 경기도 사이는 혈압 낮은 혈관처럼 빡빡하다. 몇 초 단위로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밟았다가 떼기를 반복하니 종아리도 아렸다. 커피는 진작 모두 해치운 후였다. 얼음과 잔의 벽에 맺힌 이슬이 차창에서 흘러오는 빛에 반짝였다. 그럼에도 뇌는 여전히 자신이 졸리다고, 카페인이 부족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경기도로 진입하고 몇 분이 지나자, 차도가 슬슬 뚫리기 시작했다. 이제 차가 적어지는 구간에 진입했다는 생각이 드니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그걸 자각하자 피곤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그러다가 쾅소리가 났다. 온몸을 강타하는 충격에 나는 눈을 떴다. 나의 몸은 반쯤 튕겨나갔다가 안전벨트에 걸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유리 파편 때문에 몸 이곳 저곳이 따끔거렸다. 어쩐지 시야가 흐렸다.
"최 사원 괜찮아?"
충격 때문인지 목이 돌아가지 않았기에 나는 정면의 승합차를 보며 최 사원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내 말에 반응하여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의식은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손이 덜덜 떨려 119를 누를 때까지 핸드폰을 몇 번이나 놓칠 뻔 했다. 전화를 걸자 의식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이후였다. 곧 간호사들은 엑스레이 찍는 걸 도와주었고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검사가 끝난 후 의사는 나와 최 사원을 이르며 기적이라고 말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부러진 곳도 없고 금 간 곳도 없네요. 그래도 근육이 놀라긴 했을 거에요. 며칠 후에 아플 수도 있는데 근육이 놀라서 그런 거라 크게 놀랄 건 없으시고요. 너무 아프면 병원 가세요."
나는 병원에서 곧장 퇴근했다. 현관에 들어와 신발을 벗고 보니 배가 심하게 주렸다. 탕비실의 과자와 커피로 점심을 간단히 때웠기 때문이고, 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부엌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기척을 느끼자, 왔니? 하고 성의 없이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오래된 밥과 마른반찬을 꺼냈다. 내가 먼저 보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아니, 됐다. 어머니가 먼저 보험을 화제로 꺼내면 그때 말을 하면 된다. 땡, 전자레인지가 보온을 마쳤다. 나는 밥그릇 위를 덮어놓은 랩을 집게손으로 벗겨냈다. 건너편에서 엄마는 여전히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 기미도 없는 걸 보니 그녀는 보험에 대한 건 깡그리 잊어버린 듯했다. 밥을 두 입 정도 먹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풀고, 씹고 맛을 보는 과정은 너무 힘겨웠다. 나는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긁어냈다.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싱크대 위로 밥 뭉치가 뭉툭하게 떨어졌다. 차려놓은 것들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우니 온몸이 뻐근해졌다. 최 사원에게 운전을 맡겨야 했다. 어쩌면 부장의 말대로 때려치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