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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May 06. 2024

칸트에게 철학을 묻다.

 "철학이 뭐야?"

 위대한 철학자이자 필자의 남편이기도 한 칸트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하길 "철학은 철학함을 배우는 거야." 너무 난해한 대답이다. 볼멘소리하며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철학은 이성의 오해를 제거하는 거야." 


 저 두 말은 실제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 써놓은 말이기도 하다. 저 대답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아보자. 그를 위해선 칸트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철학을 하였으며 결과물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철학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인식론에 속한다. 즉, 그의 인식론에 대한 설명이 내용의 주를 이룰 것이다. 


 칸트의 상황

 

 칸트는 본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독일관념론의 시대를 열기 이전에 대륙의 합리주의 전통에 속해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바다 건너에서 흄이라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수학과 형식논리학을 제외한 모든 인식은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경험이란 인간의 인식 중에 선험적인 것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고, 칸트 같은 이성주의자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기도 했다. 


 합리주의자들에게 이성이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인식-여기엔 인식의 형식도 포함된다.- 으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그들에게 신뢰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믿어졌으며, 자연히 사물을 탐구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즉 흄의 주장은 합리주의자들의 지적 기반 자체를 뒤흔든 것이었다. 흄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례는 인과관계에 대한 주장이다. 그는 인과관계라는 당연해 보이는 현상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과관계는 A라는 현상이 있을 경우 응당 B라는 현상이 뒤이어 따라오는 경우를 지칭한다.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확실한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인 셈이다. 흄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당구를 예로 들었다. 흄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여자보다 당구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을 거란 뜻이다.


 큐대로 충분한 힘을 주고 공을 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 공은 땡그르르 굴러가 동선상에 있던 다른 공을 칠 것이다. 우리는 당구공과 당구공이 충돌한 것은 큐대로 공을 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인과관계라고 생각하리라는 것도 자명하다. 하지만 흄은 단지 한 사건 뒤에 다른 사건이 일어났음을 관찰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많이 발생하기에 인과관계가 형성된다, 라고 착각할 뿐이다. 즉 인과관계란 없다. 


 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흄은 할 얘기를 다 했다며 당구를 치고 있었다. 칸트의 대단한 점은 자신의 상식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비판적 영감을 받고, 그를 자양분 삼아 자신만의 철학관을 제시했음에 있다. 그에게 흄은 학문적 위협이기지만 포용의 대상이기도 했고, 학문적 동료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칸트는 자신의 책에 그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며 존중을 표하기도 한다. 니체는 칸트가 이성을 비판하는 척 하면서, 이성의 권위를 재확인시켜 준 보수주의자라고 해석한다. 적의가 담겨있는 표현이지만 일리는 있다. 칸트는 흄이 불러일으킨 경험주의와 회의주의의 물결 속에서 이성을 수호한 철학자다. 


 마지막으로 로크가 칸트에게 준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같다. -베이컨을 뽑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그는 영국경험주의의 시초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로크는 자신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료들을 정리, 종합하는 일에는 탁월했다. 그는 영국의 학문적 성과들을 종합하며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칸트 인식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표상론도 이러한 과정에서 고도화되고 유럽에 퍼져나갔다. 로크가 칸트에게 준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사물에 대해 탐구하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먼저 분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바탕이 없는 인식과 학문은 공허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 비판』의 문제의식은 사실상 로크의 것과 동일하다. 칸트는 이 말과 거의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칸트의 인식론 

 

 이전까지의 철학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칸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도, 규정하지도 않았음을 지적한다. 즉, 눈을 밖으로 돌리기 전에 인간의 내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기관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감성, 과거에는 오성이라는 어휘로도 자주 번역되었던 오성, 마지막으로 이성이다. 


 감성은 연장을 가진 무언가를 받아들인다. 연장이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속성이다. 대강 질량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속에서 받아들인 인식을 지성에서 전달한다. 지성 역시 범주라는 논리적 형식성을 가지고 있다. 감성과 지성을 거친 인식을 칸트는 경험이라고 -혹은 개념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감성을 통해 사과들의 데이터를 수집했다면, 지성은 그 데이터를 통해 "익은 사과는 빨갛다.", "사과는 풀에서 자라지 않는다." 등의 명제를 얻을 수 있다. 


 이성 역시 나름의 논리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지성과의 차이점이라면, 지성은 감성의 산출물을 이용하고 이성은 지성의 산출물을 재료로 한다는 점이다. 그 재료를 통해 세상에 어떠한 법칙을 세우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즉 보다 근본적이며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인력을 깨달았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 볼 수 있다.-실제 칸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뉴턴의 만유인력에 대해 언급하기도한다.-중요한 것은 감성과 지성, 이성이 모두 선험적이며 각자의 고유한 형식이 있으며 그에 따라 인풋과 아웃풋이 있다는 점이다. 


 칸트의 일차적 목적은 철학의 확실한 영역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철학은 대개 형이상학적이다. 형이상학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의 주무기관 역시 이성일 수밖에 없다. 즉 철학의 영역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후에 철학이 무엇인지 본격화하기 위해 칸트가 선택하는 일은 유비다. 다른 이성의 학문인 수학과 철학을 비교한 것이다. 수학 역시 선험적이며 논리적인 수행 과정을 뼈대로 한다. 즉, 새로운 지식을 창출함과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의미다. 칸트는 수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학도 결국 특정한 개념을 대상으로 다루지만, 칸트가 염두에 둔 철학 -초월철학, 형이상학 등…..,- 은 이성의 작동 원리 그 자체를 다룬다. 다시 말해 개념을 다루는 원리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신이 따랐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비판한다. 그는 이전의 합리주의자 이성의 월권을 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순전한 형식이기에, 경험과 유리된 사유는 무의미하다. 즉, 칸트는 감성과 지성을 통해 산출된 재료를 통하지 않은 인식을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방식으로 영혼, 신이나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 우주가 유한하냐, 무한하냐 등의 화두에 접근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칸트는 이런 논의들이 무척 부적절하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칸트가 이에 대해 완전히 무시했던 건 아니다. 그는 상기의 문제들에 대해 변증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철학이란


 무의미한 논의를 일축하고, 그에 따른 변증법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는 이성의 오해를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잊을 만할 때마다 이성은 스스로의 성질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언급한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실수를 교정하며 이성의 오해를 절개하는 일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과정을 주관하는 기관이 바로 이성이라는 사실이다. 칸트는 스스로를 재판하는 존재로서의 이성을 제시한다. 철학이 이성의 오해를 제거하는 학문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다. 이성은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지만, 실수를 바로잡을 능력 역시 내재하고 있다.


 “철학은 철학함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주장도 이와 연결되는 명제지만, 완전히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철학의 영역을 확립하기 위해 책을 썼다. 즉 이전의 철학은 학문이라 불리기 함량 미달의 것이었다. 학문이라면 응당 체계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철학은 그렇지 못했다. 처지가 이러니  철학은 아직 어떠한 모상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모상이 있었다면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있었으리라. 즉 위의 명제는, 현재의 철학은 모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철학이 이난 철학함인 셈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러한 철학에 다가가는 활동 전체가 결국 철학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에서 철학은 일종의 방법론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칸트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러기 위해 칸트의 철학이 어떠한 맥락에 있는지, 또 어떤 내용을 가졌는지 일부 살펴보았다. 분량의 문제로 설명이 불충분한 것 같지만 글의 요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칸트에게 철학이란 이성의 오해를 제거하는 학문이었다. 인식의 주무기관중 하나인 이성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오해를 제거하는 업무 역시 이성에게 주었다. 이가 바로 칸트 철학의 핵심 중 하나기도 하다. 다음으로 철학은 철학함을 배우는 것이다. 철학은 아직 보고 배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석에 따라 철학에 다가가는 활동 자체, 어쩌면 이성의 오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과 방법 자체가 철학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할 성싶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걸까? 역시 내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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