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학파, 한국에선 비판이론가라고 불리는 이들은 현대 사회에 내재된 모순을 향한 무조건적인 비판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이 어떠한 이상사회를 제시하거나, 혹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뤄진 일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축이었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는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사회를 이성적인 사회 내지 모두의 자유가 조화되는 사회 정도로만 표현했다. 이들의 심리는 여러 원인으로 분석된다. 그 중 하나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혁명을 일으킬 동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통감하며 허무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둘 째는 비판이론의 본질이 현실의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공격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의 이상사회가 도달한다 하더라도, 비판이론은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유일한 길이노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무엇인지는 이 글을 참조 바람. 추가적인 논의는 이 글을 참조 바람.)
허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모두가 최후까지 이러한 노선을 유지했던 건 아니다. 그러한 연유로 학파에서 추방되다시피 한 인물도 있는데, 걔 중에는 학파의 핵심부에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에리히 프롬이 그들이다. 둘 모두 아도르노가 영입한 인물이었다. 전자의 경우 헤겔 전공자로서, 후자의 경우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로서 영입되었다. 어째서 아도르노는 자신이 손수 영입했던 인물들을 내칠 수 밖에 없었을까?
마르쿠제는 신좌파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세계대전 당시 미국 CIA에 근무하여 나치의 패배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헤겔을 전공하였고 공산주의단체에 여러분 적을 두기도 했던 마르크스주의자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차후 애매모호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여타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파들 사이에서 가장 마르크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거리를 둔 것은 대외적으로는 68운동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대다수는 당시 학생들의 폭력성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이들을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던 학생들은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이며 공격 대상에 포함시킨다. 아도르노는 이에 사망했고 -지병 때문에 죽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버마스는 잠시 교직에서 물러나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반면 마르쿠제는 기성세대 중 68운동의 급진성을 옹호하며 나선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마치 락스타처럼 세계를 누비며 학생들을 이끌었다. 동시에 자신의 학문체계를 증축해 나가며 신좌파의 아버지이자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다만 마르쿠제와 프랑크푸르트의 작별은 68운동에 대한 견해차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의 사상적 노선이 점점 전통적인 비판이론과 멀어지고 있었다. 우선 마르쿠제가 사회진단에 대해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대의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고 정의했다. 이름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시피, 이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깊은 사고를 배제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이러한 배제는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유로 한다. 일차원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비판의식이 상실된 일차원적 인간이 되고 만다.
마르쿠제의 사회진단은 사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통용되던 것이다. 그가 학파의 뜻을 거스른 것은 구체적인 이상사회를 전제하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이 이상사회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도움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문명이란 개인의 본능을 억압함으로써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였으나, 이런 억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개인의 본능을 어쩔 수 없이 억압하는 기본 억압이다. 또 하나는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으로, 과잉 억압이란 단어로 불린다.
마르쿠제는 기본 억압에 대해서는 찬동했다. 그가 공격하고자 했던 것은 과잉 억압이었다. 과잉 억압을 무너트린다면 기본 억압과 인간의 본능적 쾌락이 일치하는 이상사회가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의 무의식에는 과잉 억압을 패퇴시키려는 욕구가 내재되어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이상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다 성숙하고 발달한 문명이 필요했다. 그는 산업 기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자동화를 확대,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고 여가 시간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바탕에서야 노동에 있어서의 인간 소외가 극복되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열릴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실 마르크스가 누누이 이야기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신좌파가 어떠한 사상인지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구좌파는 소련을 비롯한 동부권의 공산주의 사회, 또 그들에 대한 지지자들을 주축으로 하였다. 그들의 이상향은 국가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공산사회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관료주의를 비롯한 여러 억압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낀 좌파들이 바로 신좌파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권위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가했다.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관료주의나 기존의 공산사회, 가부장제 등을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비합리적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마르쿠제는 성 해방을 중요시했다. 그가 혁명의 동력으로 에로스 -리비도와 자기 보존 본능의 결합품이다.- 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신좌파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유럽의 남녀혼숙문화 등도 이러한 성해방운동의 결과물이다. 68년도, 성해방에 대한 젊은이들의 지지와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소아성애에 대한 차별도 철폐해야 한다고 일시적이나마 주장되기도 했다.
비판 철학의 방법론 중 하나는 여러 학문 분야를 두루 살피는 일이었다. 이런 방법론을 가장 잘 수행한 것은 에리히 프롬이 아닐까 싶다. 그는 대학에서 -본래 법을 배웠으나 전공을 바꾸었다.- 사회학을 전공했고, 직업적으론 심리치료소의 치료사-즉 정신분석학-였다. 또 기독교, 선불교, 실존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역사적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마르쿠제처럼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진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구체적으로 이상사회에 대해 제시하였으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의 성격적 변화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비판이론과도 마르쿠제와도 상당히 구별되는 주장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사회구조와 사회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당연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면 될 것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프롬은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물질적 구조와 구성원들의 성격 구조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한다, 주장했다.
프롬은 주체와 대상이 관계 맺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소유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 시대에 돌입하며 전자가 크게 확대되었다. 소유의 문제는 인격체의 자유와 실존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반면 존재로의 방식은 대상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방식이다. 다른 표현으론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롬은 개인의 정서적인 수양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적 부조리를 개인 간의 관계나 온화함 따위로 해결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을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이 조금만 빨리 책들을 내었다면, 저 이름들 안에서 언급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프롬이 제시한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살펴보자. 그는 생산수단은 개인 혹 기업이 가지든 국가가 가지든 노동자들의 삶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이 기업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을 갖추며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가적으로 프롬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도록 자원을 생산하고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유재산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재산의 차이로 인해 개인들 간의 경험에 큰 차이가 생겨나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다. 이는 자유 시장 경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추가적으로 그는 ‘여론’이란 충분히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아니기 때문에 소집단에 의한 정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나 평등한 투표제도 등이 인류가 다시 잃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극찬하면서도 말이다.
추가적으로 그의 저작에서 여러 번 공통으로 보이는 주장이 있다. FDA처럼 제품을 평가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물론 이 기관은 FDA보다 훨씬 거대하며 여러 분야를 아우른다. 이 기관에는 과학자나 공학자 외에도 종교, 철학, 사회학에 능통한 인간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특정 제품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토의를 진행한다. 이런 절차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프롬은 이러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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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는 허무주의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혁명-특히 노동자계급-을 믿지 못하였고 어떠한 유토피아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제와 프롬은 달랐다. 마르쿠제는 행동을 중시한 뜨거운 철학자였고, 동료들과 비교하였을 때 무척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의 쾌락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미래상을 꿈꿨다. 그 결과 탄생한 신좌파는 오늘 날에도 역시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 영역에서의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프롬은 마르쿠제처럼 급진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배격했던 신비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사회구조에만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과는 달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개인들의 성격적 변화 역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그가 제시한 이상사회는 마르쿠제의 것만큼이나 구체적이다.
아도르노가 이들을 내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공통적으로는 구체적인 이상사회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사회가 바뀔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회가 지닌 모순을 지적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자신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제와 프롬은 달랐다. 마르쿠제는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된 혁명적 성품을 믿었고, 프롬은 개개인들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