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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an 01. 2024

우울하게 문화산업을 보는 법

『계몽의 변증법』제 4장「대중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

 20세기의 독일 출신 철학자였던 아도르노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계몽의 변증법』의 4장인 「대중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 역시 파시즘적 특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어떠한 면에서 자본주의는 보다 세련된 나치였다. 절대화된 이데올로기와 체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창출한다는 점에서도  철저히 관리되는 세계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세계에서 문화산업을 대중 기만의 수단이자 자본주의의 체계를 공고화시키는 도구라고 아도르노는 지적한다. 이 글의 목적은 「대중 기만으로서의 문화산업」에 대해 정리하고 요약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왜 그가 문화산업에 대해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지에 살피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속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적 기반에 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은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정리 및 요약" 참고)


 문화산업은 ‘유흥’이지만 ‘예술’로 취급되기도 한다. 논의의 전진을 위해선 아도르노가 각각을 어떻게 정의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유흥이란 다음 노동을 위해 긴장을 푸는 행위다. 예술이란 긍정 -동일성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식- 등을 이용하여 부정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터부시되는 사람, 혹은 대상들- 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좋은 예술 작품이란 긍정과 부정의 긴장상태를 충분히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걸 생각해 보라. -아도르노는 이러한 참여문학을 예술보단 논설문이나 설명문처럼 취급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문화산업은 유흥의 역할도 예술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만이 문화산업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을 성싶다.


 유흥은 본래 다음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수단이다. 하지만 역으로 문화산업으로서의 유흥은 독자를 소비시킨다.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은 끊임없이 자본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장 내부의 기계들도 밤낮없이 가동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흥은 노동의 연장이 되며 인간은 일종의 기계가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으로 대표되는 공적세상로 이외의 사적세계도 흡수해 버린다. 노동시간 외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노동하며, 자본주의라는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소비된다. 유흥의 의미는 이렇게 퇴색된다. 소비된 개인은 더 이상 예술을 감상할 여유란 없다. 스스로 성찰할 시간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통찰할 기운도, 프롤레타리아 간의 유대를 쌓고 혁명을 일으킬 힘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문화산업은 어떤가? 일단 문화산업이 예술을 차용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팔리기 위해서다. 팔리기 위한 새로움과 세련됨 따위를 성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술하였듯 아도르노에게 예술이란 동일성을 통해 특수성을 보이는 것이다.-긍정을 부정적인 긍정으로 보는 것이라 말해도 좋고.- 좋은 예술이라는 양측 모두에서 훌륭해야 하며, 둘 사이의 긴장이 발생해야 한다. 결국 예술은 부정을 세상에 표현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문화산업에서도 긍정을 통해 부정을 내보이는 형식 자체는 나타난다. 아도르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비극성을 예로 보인다. 고전 비극작품들을 떠올려보자.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쉬운 예는 『에밀리아 갈로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같은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 모두 예술의 특정한 형식 속에서 기존 가치와 갈등하는 자들이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기존의 가치를 숭상하는 자들과 긴장하며 갈등한다. 사실 긍정과 부정은 필연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사회를 위해서 -적어도 아도르노의 관점에서는- 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산업에서는 둘이 화해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 비극이라는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화해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화해가 아니다. 흔히 방영하는 드라마의 내용이나 결말 따위를 떠올려보자. 사회에서 고통을 받았던 주인공이 적응하는 모습이 일종의 내적 성장으로 나타나며, 더 높은 신분의 사람과 이성애적으로 결합하며 흔히 끝을 맺는다 -정말 말도 안 된다-. 또한 악녀와 같은 작품의 반동 인물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표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인물들은 철저히 파괴되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화산업은 이렇게 인간이란 체계에 속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내재화시킨다. 사회의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바뀌거나, 사회에 순응하지 못한 자들이 파괴될 뿐.


 물론 세상은 변화한다. 문화산업 역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인 의미로, 혹은 진정한 의미로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문화산업에 한해서 새로움이란  예술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역시 유흥을 위해서도 아니고. 사실 새롭다 칭하는 것도 민망하다. 상당한 경우 작품들은 체계 내에서 용인되는 형식을 따라간다. 이 용인되는 형식이란 많이 팔리는 형식이기도 하다. 몇 가지의 동일한 스토리적 유형들 사이에서 대개 바뀌는 것은 소재 뿐이다. 문화산업의 제작자들은 새로운 소재를 문화산업의 형식에 끼워넣는데 훈련된 자들이다. 물론 문화산업의 종사자들과 ‘예술가’사이에서도 개혁가나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이들 중 수용되는 것들은 ‘충분히 반체제적이지 않은 것’들 뿐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새로움이란 새로운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 동시에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해서만 허용된다. 근래에 호평을 받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와 같은 드라마가 이런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다. 기존의 드라마들과 변한 것은 단지 소재 뿐이다. 이 소재란 것도 철저히 상업적 계산에 따라 선택되며, 지나치게 어려워 금전적으로 손해가 될 것이라 판단된다면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 그러니까 문화산업이 유흥도 예술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산업이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본질적인 기능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은 결국 부조리한 자본주의 체계의 유지수단으로서, 장의 제목처럼 대중기만의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이는 여러가지 층위로 분석될 수 있다.  문화산업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순응하지 않는 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도록 만듦과 동시에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이는 서로 다른 개인들을 동일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기계화이기도 하다. 이런 예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제작자들은 유머포인트를 만든다. 그 유머가 나오는 지점에는 우스꽝스럽고 가벼운 음악을 집어넣는다. 코미디 프로같은 경우엔 타이밍에 맞게 웃음소리를 스피커로 재생한다. 시청자들을 웃도록 강요된다. 시청자들은 같은 지점에서 웃는다. 우리는 철저히 제작자들이 의도한 인물에게 공감하고, 의도한 부분에서 감정의 동요와 공감을 느낀다.


 또한 문화산업은 ‘실재’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탈바꿈 -이는 비판철학자들의 실증주의 비판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시킨다.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도덕적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들은 사회적 부조리가 실재한다는 이유로 도덕적 의문을 뭉개버린다. 만약 실재하는 부조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비실증∙비과학∙비이성적인 인간의 징후다. 개인은 사회의 지배적 이념과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수상한 자들이자 외톨이가 된다. 이러한 것은 상품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아도르노는 이제 선전되지 않은 상품은 수상한 상품이 되며, 이러한 점에서 문화산업은 선전이다.


 문화산업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욕망의 해소를 약속한다. 하지만 문화산업에서 욕망의 해소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뤄지진 않는다. 약속하지만 지키진 않으며 끊임없이 뒤로 미루기만 한다. 이것의 가장 적나라한 예는 포르노그라피라고 할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는 우리의 욕망을 해소해 줄 것같이 굴지만 뒤로 유예할 뿐이다. 흔히 신데렐라물이라고 통칭되는 로맨스 드라마도 형편은 비슷하다. 그들은 평범하고 적당히 가난한 여성 주인공에 시청자를 몰입시키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란 거짓 환상을 심어준다. 문화산업이 대중 기만이라는 비판은 이러한 층위로도 언급될 수 있다.


 이러한 양태를 많은 사람들, 그리고 문화산업의 주체 스스로는 역사와 기술, 매체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모든 가치는 시장에서의 수입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오늘날의 유흥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다. 이는 어떠한 점에선 뻔뻔스럽다. 특히 뻔뻔스러운 것은 문화산업의 제작자나 주체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은 그저 장사일 뿐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문화산업의 허접쓰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호르크하이머가 말하였듯, 사회는 인위적인 존재다. 하지만 많은 경우 -다른 표현으로는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는 체제 유지의 이득을 위해 조성되고 유지되는 인위적인 것이지 결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타난 비판의 일부는 과장되었고 지나친 것처럼도 보인다. 시간이 꽤 흘러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문화산업 역시 거대한 자본의 영역 중 하나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떠한 면에서는 파시즘적이라는 것 역시 일견 설득력이 있고.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책을 통해 문화산업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에도 큰 의의가 있다. 그가 조목조목 제시하는 비판 중에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사유 방식이다. 이견은 이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더 나은 사회는 비판 없이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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