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둘 다 아니다.
철학자 중에 가장 많이 오해를 사는 사람을 꼽으라면, 쇼펜하우어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이는 특유의 문체 탓도 있겠지만, 그가 살았던 18∙19세기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태어나 1860년에 죽었다. 이 70년 동안의 유럽은 무척 과도기적이었다. 여러 과학적 성취들이 이뤄지며 생물학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뇌를 대상으로 한 해부학, 생리학적인 혁신적인 연구결과들이 나왔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진화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는 실제 과학자들에게 직접 생리학을 배우기도 했고, 자신의 저서에서 몇몇 실험들과 학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평하기도 했다. 그 역시도 진화론자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과학이론을 아주 빠르게 배웠고 자신의 체계 속에 녹여냈다. 그의 이러한 -어쩌면 시대정신의 요구였던- 학문적 방향성이 그러한 오해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처럼 과도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니까.
'쇼펜하우어는 유물론자인가? 관념론자인가?'라는 논쟁-이기도 한 오해-은 그에 대한 해석이 가장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오해는 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려던 그의 학문적 의도 밑에서 자라났다. 필자의 이번 목표는 상기의 물음을 해소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유물론자인가?
김미영 저자가 쓴 「쇼펜하우어와 19세기 초 생물학」에 따르면 20세기 프랑스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유물론자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들은 쇼펜하우어가 유물론을 채택했음에도 관념론적 관점을 유지하며 철학적 일관성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우선 쇼펜하우어가 유물론자로 보일 법한 부분부분들을 짚어보자.
1. 쇼펜하우어는 과학이론들을 아주 빠르게 수용했다.
2. 인식은 뇌의 생리학적 작용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3. 질료를 실체라고 주장했다.
1번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생략하겠다. 설명 거리가 있는 것은 2번과 3번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인식은 뇌의 기능이며, 질료는 실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들을 보고 쇼펜하우어를 유물론자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했던 데카르트나 자아나 정신을 절대화했던 독일 관념론자들과는 썩 다른 태도다. 인식과 자아 따위는 결국 -자아는 인식의 기본형식이므로- 뇌라는 물질에서 기반한다는 뜻이니까. 또한 질료를 실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유물론의 기본 테제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저것만으로 쇼펜하우어를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의 철학체계가 가진 전반적인 맥락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선 그를 관념론자로 볼 만한 요소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인가?
1. 그는 칸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철학자다. 어떻게 분류하냐에 따라선 독일 관념론자에 포함시키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2. 그는 의지를 실체라고 보았다.
3. 자신의 저서에서 직접적으로 유물론을 경계하는 말을 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을 가장 많이 차용한 철학자-적어도 역사에 남은 사람 중에선-다. 또한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두 저작에서 직접적으로 유물론을 경계하는 논조의 말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그렇게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그의 철학적 결과물이 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니 위의 2번 문항을 중심으로, 쇼펜하우어의 체계를 보다 내밀히 살펴보자.
그의 체계에서 세계는 둘로 나뉜다. 의지의 세계와 표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바로 표상의 세계다. 여기서 그는 의지를 실체라고 밝힌다. 그가 생각하는 의지란 우리가 생각하는 의지와는 퍽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중력이나 인력 같은 물리법칙과 유기체의 종족 보존 욕구 등을 포괄하는-이다. 실체 세계라는 점에선 플라톤의 이데아와 결이 같다.
여기서 독자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위에서 쇼펜하우어는 질료를 실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질료란 의지의 객관화라고 말한다. 즉 질료란 표상 세계에서 인식되는 것이며, 의지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또한 그의 자연법칙은 목적론적이다. 가령, 인간에게 눈이 있는 이유는 보기 위한 의지의 현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렇듯 쇼펜하우어에게 물질은 의지의 파생물이다. 유물론이 “모든 것의 근원은 물질이다.”라는 점을 고려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근원은 물질이 아니라 무형의 자연법칙이고 물질이란 그런 자연법칙의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지라는 이름만 보면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다만, 관념론에서 말하는 관념 실체란 '생각'이라는 행위를 필수조건으로 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목적론적인 법칙이긴 하지만, 관념론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긴 어렵다. 즉 그를 관념론자로 파악하기도 무리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통합론자다.
위에서 언급했던 「쇼펜하우어와 19세기 초 생물학」에서 저자의 핵심은 쇼펜하우어의 체계가 통합적인 체계라는 것이다. 논문의 결론부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기계론적 유물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지 관념론을 받아들이거나 과학과 형이상학을 다른 영역의 연구로 구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철학과 생리학, 즉 형이상학과 과학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본질을 꿰뚫은 지적이다.
그러한 의도로 철학을 하고 과정을 거치다 보니, 그의 체계에는 관념론적으로 읽히는 부분들과 유물론적으로 읽히는 부분들이 혼재해 있다. 하지만 그를 한 쪽-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전통적인 관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관념이든, 물질이든 세상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사고를 할 필요성이 있다. 쇼펜하우어조차 물질과 관념의 구분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말 -그런 사람들을 못 배워먹은 사람이라고 하는 건 덤이다.-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