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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Aug 05. 2024

정의감은 어디서 오는가?

칸트와 아도르노의 이론

 분노라는 감정이 항상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건 아니다. 악을 향한 분노, 다른 표현으로는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분노는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이며, 동일한 목적의 행동을 촉구한다. 가령 한 나라의 왕이 처가댁으로 도망을 가다 백성들의 공분을 산다거나,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사태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온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즉 분노의 주체가 기대하는 바와 현실이 괴리되었을 때 정의감이 생겨난다. 그리고 역사 상에는 이 정의감을 바탕으로 시대적 진보를 일으킨 사건도 여럿 있다. 철학자 중에도 이런 현상을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걔 중에는 기대와 현실의 괴리에서 선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생겨남을 지적한 이들도 있다. 독일의 칸트와 아도르노가 그들이다.


  칸트의 경우

 

 칸트에게 인간은 이성적인 행위자였다. 이성은 선험적인 능력이기에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으며, 충분히 잘 사용한다면 가장 객관적인 탐구의 방식이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에게 이성은 인식의 내용이라기보단 형식이었다. 이 형식이 바로 논리법칙이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법칙은 논리학에서 배우는 딱딱한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령 A=B, A=C, B=C, 따위 말이다. 칸트는 논리법칙을 세계 전체로, 때때로 세계 밖으로 까지 확장시킨다.


 전술했듯 모든 사람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 즉 논리법칙에 따라 실현되어야 마땅한 세계를 개개인 모두가 상상해볼 수 있으며 추구하고 희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상이나 희망같은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성적이어야만 한다” 에 가까우니까. 그러니 세상과 사회가 이에 벗어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정욕구, 즉 불만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칸트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다. 또 이러한 본성과 불만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간 행동의 동력원이 된다. 이성은 칸트의 철학에서 이렇게 실천을 위해, 또 도덕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칸트에 대해 마치기 전에 그가 자신의 인식론 체계에서 감정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위에서 정의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는 쉬운 설명을 위해 쓴 표현일 따름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였다. 어찌되었든 칸트는 논리적인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괴리에서 사람이 행위를 한다고 지적했음은 사실이다. 또 이를 정의감에 의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건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이성의 한계점을 비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가 이성의 가치 자체를 말소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가 문제로 삼았던 것은 이성이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상황이었지, 행동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이성은 옹호했다. 저서에서 나타나는 그의 언행들을 보면, 이성에 대한 옹호를 넘어 믿음 조차도 엿보인다. 이 철학자는 이성적인 사회라는 표현을 이상적인 사회라는 표현과 동일하게 사용한다.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사회가 실제로 구현되지 않는 모순적 상황을 돌파하는게 정신의 힘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상의 사고방식이 칸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굳게 믿는다.


 목적으로서의 이성과 이성적인 사회라는 관념은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이성을 수단으로만이 아닌 선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야하며, 그 선은 이성을 통해 도출된다. 칸트의 다른 언어를 통해 이데아론을 말했는데, 이는 아도르노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인 세상, 이성적인 사회 모두 인간에게 있어서 일종의 모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세상을 구현하고자 한다.  이성주의자라는 점에서, 또 그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도덕을 수행해야함이 당연하다는 듯 전제되어있다는 점에서 아도르노는 칸트의 계승자다.


 *


 우리는 두 이성주의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그 견해는 세상을 정의롭게 바꾸려는 욕구는 어디서 기원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또 그 대답은 둘이 같다고 보아도 된다. 굳이 차이점을 지목하자면, 칸트의 문제의식은 이성의 역할에 있었고,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있었다는 것 정도. 물론 두 철학자 모두 감정을 믿진 않았다. 즉 정의감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게 하는 욕구를 정의감이 아니라면 마땅히 붙일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론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도 작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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