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25살 즈음이 되면 보통의 대학생들은 취업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그동안 쌓아왔던 대외활동 이력들, 자격증들, 어학점수들을 잘 정리하고 가고 싶은 회사를 고민하며 이력서를 뿌리고 면접준비를 한다.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친구들도 있다. 학업에 뜻이 있건, 아니면 취업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시간을 조금 더 벌려고 하는 것이건 간에, 학부생 때보다 더 깊은 지식을 쌓기 위해 기꺼이 도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남들이 다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나는 와중에 나는 그 어느 길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훌쩍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1년 정도 머무르며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리게 된다. 오늘은 케냐의 태양만큼 따가웠던 그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역사학도로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점수 맞춰서 대학에 가게 되는 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원하는 학교와 원하는 과에 한번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는 행운을 맞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나의 경우,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을 맞이하지 못했다. 수능 때도 역사과목을 단 한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건만, 나는 내가 가고 싶었던 5개의 학교에서 모두 떨어지고, 남은 하나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그마저도 공부하고 싶었던 과가 아니었다. 시작부터 우울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살아갈 길은 많은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선배들이 모두 자기 과에 맞춰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분야 공부를 했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 입학한 대학이나 과로 꼭 졸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에는 다른 학교로 중간에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고, 과를 옮기거나 복수전공을 해서 두 개의 과를 이수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진로를 찾아가고 있었다.
나같은 경우, 어린 시절부터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언니는 UN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언니가 하는 것은 다 멋져보였던 그 때, 나 역시도 UN에서 일하는 그런 삶이 너무 멋져보였다. 내가 어린시절 꿈꿨던 커리어 우먼의 모습인 것 같았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며 외국에서 살아가는 그런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돈 버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는 국제기구에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는 그 사명감이 좋았다. 내가 하는 일이 멋진데다가 세상을 이롭게하기까지 하다니, 이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름도 비스무리한 국제학을 복수전공하게 되었다. 2학년 때까지는 전공과목을 다 이수하고, 3학년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복수전공 과목인 국제학에 몰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제학과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탁상공론일 수 있겠다.
아프리카와 UN에 대해서 떠들고 세계 평화와 안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곳에 가보거나 그곳을 경험해본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이상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수업만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데, 뭘 할 수 있을지 잘 몰랐다. 그리고 그 무렵 우연히 듣게 된 강연을 통해 나는 내가 나아갈 다음 스텝을 어느정도는 정하게 되었다.
한창 책상 위에서 논문을 읽고 토론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때즈음, 나는 우연히 아프리카 인사이트 허성용 대표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대표님은 아프리카에 직접 파견봉사를 다녀와서 자기가 느낀 점을 공유하며 아프리카에는 다양한 면들이 있는데, 전쟁과 가난, 기아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비춰지는 것이 안타까워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활동을 하고자 단체를 설립하게 되셨다고 했다.
대표님의 강연을 듣고 있자니, 답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회의감은 현장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동안은 막연하게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만 흐릿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현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한국과 가장 먼 대륙이라고 느껴질법한 그 대륙에 대해 나는 잘 아는 것이 없었고, 어쩌면 대표님이 말하신대로 전쟁이나 기근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아프리카로 떠나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매력적인 문화를 느끼며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야 국제기구에 가서 일을 하던,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하든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경험없이는 왠지 내가 이후에 밟는 스텝에서 항상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 케냐로 향했다.
그렇게 훌쩍 떠난 케냐에서 나는 400일정도를 머물렀다. 수도에서 6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NGO의 지역 개발 사업을 맡아 운영했었는데, 아무래도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이 일을 하다보니, 마을 사람들하고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고, 그 동네에 외국인이 많이 없다보니, 이래저래 예쁨받으며 일년을 보낼 수 있었다.
워낙 문화부터 사람들까지 익숙하지 않은 것 투성이었고, 정말 지구 반대편의 세계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겪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일들.
비닐봉지가 금지된 케냐에 입국하기 위해 비닐 없이 짐싸기에 도전했던 일 (실제로 입국할 떄, 짐검사를 당했다!)
날아다니는 개미를 팅커벨로 착각하여 문 열어놓고 감상하다가 집이 완전히 뒤짚어진 일
살던 집에 와이파이를 구축하기 위해 통신사 직원과 무려 두달 동안 매일같이 전화통화를 하며 입씨름하다가 절친이 된 일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동안 현장 모니터링 업무를 위해 돌아다니다가 진흙밭이 된 길에 차 바퀴가 완전히 빠진 일. (물론 차를 미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같이 파견되었던 동료들과 우리 집에서 2박 3일간 쉼없는 먹방파티를 한 일
같이 일하는 현지 동료들과 같이 사파리 체험을 갔다가 버팔로한테 쫓겨 달아난 일
무려 두 달동안 단수가 되어 집 근처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다가 가스레인지로 데워 조금씩 덜어 샤워를 했던 일. (이때 처음으로 변기물을 내리기 위해 어느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한국과 다른 기후 덕분에, 나시티에 냉장고 바지를 입고 수영장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냈던 일
아프리카의 전통 키탱게 천이 너무 예뻐서 매일같이 수선집에 가서 맞춤 옷을 제작해 입고 패션쇼를 벌였던 일. (특히 현지 아주머님들이 참 좋아해주셨다)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던 일
갑자기 정전이 되어 어둠속에서 샤워를 했던 일이나 하루 이상 휴대폰을 충전하지 못해 일을 하지 못했던 일
업무상의 이유로 캐냐의 공무원 분들, 은행원 분들과 수많은 미팅을 하며 친해졌던 일
현장 모니터링 중에 우연히 얼굴도 모르는 분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맛있는 밥을 얻어먹고 온 일 (꿀맛이었다)
현지 NGO 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던 일 (그리고 그 핑계로 아름다운 케냐 곳곳을 여행했던 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한국인 동료가 현지에서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일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고만은 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케냐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경험들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힘들 때면, 그때의 기억들을 꺼내보며 한바탕 웃고 넘어가곤 하니까, 어떻게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보물보따리를 얻은 셈이다.
같이 파견생활을 했던 룸메이트와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일을 겪었고, 그로부터 각자가 느낀 점들이 있었다. 그래서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맛난 저녁을 요리해먹으며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환경 등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 대화들은 다시 서로에게 자양분이 되어 다음 날에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즐거웠던 케냐생활과 함께, 나는 나의 일과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고민이 많던 어느날, 우연히 우리 기관의 택시기사분과 나눈 이야기가 나에게 큰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그동안은 그냥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나누는 정도여서 택시기사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우연히 택시기사분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분,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셨다고 한다. 경영학과를 나와서 어떻게 택시기사를 하게 되셨냐고 여쭤보니, 케냐 내에는 일자리가 너무 없어서 경영학을 전공했어도 취업할 수 있는 회사가 너무 없었다고 하셨다. 경영학과 뿐만 아니라 다른 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공학과를 나와도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국내에는 없기 때문에 오토바이 운전을 하거나 아예 해외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대화였을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나에게는 그것이 큰 충격이었다. 각종 국제기구와 NGO들이 아프리카에 와서 이곳 사람들의 생애주기동안 영양, 기초교육, 직업교육, 물품지원, 의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원을 하고 돕고 있지만, 막상 이 분들이 성인이 되어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면,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끊기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 고리를 이어 지속가능한 개발로 나아갈 수 있을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IT 회사들이 케냐 사람들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M-PESA 라는 서비스를 통해서, 또 한번은 Andela 라는 뉴욕의 스타트업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무렵 케냐에서는 이미 “전화시간”을 화폐처럼 사고 팔 수 있는 M-PESA 라는 서비스가 전국적으로 퍼져있었는데, 정말 재미있게도 도시 뿐만 아니라 수도에서 6시간 떨어진 아주 시골마을의 시장에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물건을 사고 팔수가 있었다. 케냐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은행 계좌가 없다고 하는데, 이 서비스 덕분에 돈을 원격으로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어 도시에서 일한 자식이 시골에 있는 부모님들에게도 현금을 직접 운송하지 않고도 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 기사도 있었다. 오히려 기존의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IT 서비스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기적으로 구독하던 구글 키워드 알리미를 통해서는 Andela 라는 뉴욕의 스타트업을 알게 되었다. 그 기업은 아프리카의 청년들에게 2-4년간 원격으로 프로그래밍 교육을 시켜주고, 교육 기간이 끝나면 직접 채용하거나 외국의 다른 기업들에게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였다. 이 서비스를 통해서 나는 일자리를 아프리카 대륙이나 케냐라는 국가 내에서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아예 해외로 그 범위를 넓힐 수도 있겠다는 인사이트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IT 기업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나니, 이런 멋진 서비스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IT는 커녕 컴퓨터도 잘 모르는 내가 이쪽 분야로 넘어가기 위해 가장 넘기 힘든 산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니, 역시 그것은 개발이었다. 일단은 내가 뭘 만들줄 알아야 이쪽 업계로 넘어가더라도 사람들과 이야기가 되겠다는 다소 단순하고 무식한 생각 덕분에 나는 케냐 생활 후반부부터 조금씩 코딩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13인치 삼성 노트북에 파이썬을 깔고 Atom 편집기로 더하기부터 하나씩 배워나갔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