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 가까이 살아오다보면, 평범한 나에게도 종종 사랑이 찾아오곤 했었다. 그렇지만, 이번 자서전 시리즈의 이전 글들을 돌아보면, 사랑에 대한 글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커리어에 주제가 집중되곤 했다. 나에게는 사랑보다 개인적인 성취와 성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이 사람을 제외하고는 내가 먼저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은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짝사랑을 했던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는 같은 공유 오피스를 쓰고 있는 옆 섹션의 무뚝뚝남이었다. 거무스름하게 수염을 기르고 자기만의 진한 패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던 그가 처음에는 전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서 서로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던지라 우리 팀과 그의 팀은 간식 시간에 서로 활발하게 교류를 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서 퇴사하게 되자, 그 옆 섹션 회사의 대표님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주셨다. 내가 일주일정도 고민할 시간을 갖겠다고 하자, 거무스름하게 수염을 기르고 자신만의 진한 패션 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에게 저녁을 같이 먹으며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기는 아저씨 같은 취향이 있었기에 좋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한 겨울 우리는 작은 이자카야에서 만나게 되었다.
공동 창업자로서 인재영입을 위한 저녁식사 자리로 이해하고 참여했던 것에 반해, 그는 일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개인적인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를 하다보니, 우리는 서로 비슷한 점이 참 많았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보다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연인과 헤어진 뒤로 약 6개월 이상이 지났다.
일과 배움 때문에 주말에 전시회를 가거나 캠핑을 가는 등 일반적인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하기가 힘들고 부담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각자 노트북 앞에서 작업하되 서로 같은 공간에서 틈틈히 소통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데이트에 대한 환상이 있다.
평범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추구한다.
지금까지 연락을 자주 안한다는 이유로 연인과 헤어진 적이 많았던 나에게 그의 존재는 마치 유니콘과도 같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연인이든 친구든 반전 매력을 가진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무뚝뚝한 생김새나 말투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재미있는 삶을 살아왔고, 생각보다 유머러스했으며, 예상하지도 못하게 가치관이 비슷해서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친해져서 그렇지-하고 넘겨버렸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말로만 듣던 짝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상태였고, 나는 사랑과 일 중에 선택을 해야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사귄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일터에서는 마음껏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회사로 가고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대시를 해보는 것도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포지션으로 제안을 받았기도 하고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여 서비스를 런칭해보는 경험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일을 선택했다. 그 사람과 잘된다는 것은 선택지에서 없에고, 내가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경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와 나는 비슷한 재질이었다. 입사하고 어느정도 적응이 되자 작업양이 많아졌고, 나는 거의 매일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야근을 자주 했다. 같이 야근을 하는 빈도가 잦아졌고, 사무실에서 도시락이나 부리또를 함께 시켜먹으며 종종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주말에 뭐하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주말에도 보통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공유했다. 그러자 그가 자기도 비슷하다면서, 매주 토요일 자신은 “인사이트 트립”이라는 이름으로 카페 투어를 다닌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토요일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이런 저런 작업들을 하며 충분하게 인사이트를 얻는 날을 가진다고 하면서 한옥카페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마침 집근처 카페에 가는 것이 질리던 참이어서 아싸-하며 이번주 토요일에 가야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가 곧이어 “같이 가실래요?”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회사 사람과 주말에 만난다고…?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벙쪄서 “어….”하고 머뭇대는 동안 3초간 정적이 흘러버렸다. 급하게 정신차리고 “좋아요!”라고 대답하자, 그도 웃어보였다. 그렇게 야근동지였던 우리 둘은 회사밖에서 주말에 만나게 되었다.
대망의 토요일이 되었고,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분은 온라인 스터디 때문에 스타벅스에 먼저 도착해있다고 했다.(역시 갓생..) 스타벅스에 도착해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는데 멀리서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던 것 같은데, 그때의 장면을 기억해보자면 투명 뿔테안경에 흰 피부, 남색 자켓에 그와 어울리는 흰색 바지까지. 멋지게 입은 그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너무 멋지게 하고 온 그를 보고 너무 설레서 급히 방향을 틀어 화장실로 도망을 가버렸다. (ㅋㅋㅋ) 숨이 멎는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건가 싶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의 상태도 체크하고, 그와 마주하러 갔다. 그리고는 함께 북촌 길을 걸었다. 그가 북촌을 잘 안다면서 맛난 레스토랑에서 밥고 함께 먹고, 소개해줬던 예쁜 한옥 카페도 같이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정도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눴는가 하면, 그날 경복궁에서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도 그와 이야기를 하느라 깜빡하고 약속시간에 엄청나게 늦어버렸다. 친구들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석고대죄를 했고 착한 친구들은 내 사과보다는 이야기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 역시 내가 이렇게 누구를 좋아해본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너무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어했다.
너무 좋았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걸 그린라이트로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만약 사귀게 된다면 앞으로 회사생활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런저런 걱정들이 가득했고, 괜히 혼자 먼저 설레지 말자-하는 생각으로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함께 보낸 토요일로부터 이틀 뒤인 월요일. 출근을 했고, 우리는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가 신경쓰였지만, 애써 모른척하고 일에 집중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퇴근 후, 잠시 카페에서 작업할 건이 있어서 사무실에 짐을 두고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카톡이 오는 것이 아닌가…! 메시지를 확인하니, 혹시 퇴근했냐는 물음이었다. 카페에서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나와있다고 하니, 함께 퇴근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너모너모 좋아요…!!!!!! ”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추고, 시크하게 좋다는 말을 남기고 마저 일을 마무리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함께 로비로 내려갔는데,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의 우산을 함께 나누어 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역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뭐하냐고 묻자 별거 안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배도 고프고 날씨도 우중중하니 “맥주 한 잔 할래요?” 하고 용기를 내어 물어봤고 그로부터 좋다는 대답을 듣고는 곧장 로컬 맥주집으로 향했다. 맥주를 시켜놓고 주말의 일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가 머뭇머뭇대며 혹시 괜찮다면,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짝사랑 하던 사람으로부터 고백을 받은 사람은 지구 상에서 몇명이나 될까? 그 중 한명이 나라는 사실이 벅찰 정도로 좋았고, 행복했지만, 진짜 진심으로 회사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이 괜찮을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그는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지만, 왠지 쉽게 헤어지고 말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용기내어 고백을 했다고. 아직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나 역시 왠지 그와의 연애가 시작되면 쉽게 사귀고 헤어질 사이는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물론 썸탈때야 뭐든 핑크빛으로 보이는게 당연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강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나는 아직 젊고 지금의 마음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결국 OK를 했고, 그렇게 맥주집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나오게 되었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내 옆에는 노트북을 들고 일하고 있는 그가 앉아있다. 나 역시 노트북 앞에 앉아 그와 함께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가치관이 잘 맞았던 우리는 2년동안 단 한번도 싸우지 않고 대화로 그때그때의 갈등들을 조율해가며 잘 사귀고 있다. 그와 함께 다니던 회사를 지금은 둘 다 다니고 있지 않은데, 우리 생각으로는 일단 끝까지 들키지 않고 잘 사귀어온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동료들이 너무 착해서 모른척 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 하긴 하지만)
각자 꿈꾸던 것처럼 우리는 매주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각자 공부하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며 데이트를 하고 있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너무 행복해서 서로를 만나 살이 5KG 이상 찌기도 했고, 작년에는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는 기획과 마케팅을, 나는 개발을 맡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행하듯 일하고 일하듯 여행하는 삶을 살아갈 언젠가를 위해 열심히 성장하고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함께 공부를 하고 아침 8시가 되면 함께 한강을 달린다.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주변 공원을 산책한다. 각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배우고 노력하지만, 함께라서, 함께이기에 덜 외롭고 덜 힘들다.
30대를 나와 닮은 점이 많은 그와 함께 시작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와 함께할 것 같아 덜 무섭고 덜 두렵다. 인생의 동료를 만나 더 폭발적으로 성장해나갈 나의 30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