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다녀와서
틈만 나면 해외를 드나들던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외국으로만 도니? 한국에도 예쁘고 멋진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가지도 너무 많이 씌우고, 관광 인프라도 잘 안 되어 있는데다가, 나이 먹고서도 언제든 갈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그런 관광 인프라 구축하는 거에요. 됐죠?"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실제로 국내 여행을 다녀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실황은 어떤지 잘 몰랐고 그래서 어떤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번 통영 여행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꿈을 꾼 후 며칠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처럼 이 생각들도 며칠 후면 금방 날아가버릴 것 같아 잊지 않기 위해 이런 글을 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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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해외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17년 관광수지는 2016년보다 무려 111%나 적자가 증가한, 14조7천600억원 적자다. (1)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그에 따라 관광이나 레저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지만 국내 관광 컨텐츠나 인프라는 그들이 원하는 수준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외 수요는 물론이고 국내 수요조차 잡아두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페이스북 '여행에 미치다' 페이지를 필두로, 해외여행 풍조가 크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젊은 층에서 두드러지는데, 젊은 층은 SNS를 비롯한 미디어 접근성이 뛰어나 새로운 정보 탐색이 용이하고, 같은 이유로 SNS의 여행 후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더하여서 해외여행을 1회 다녀오는 데 소요되는 경비 감소폭이 국내여행 소요경비 감소폭보다 훨씬 커 금전적인 여건도 개선되었다. 2015년 이후 국제유가 하락, 많은 저가항공사의 등장으로 해외여행 소요경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권 구입 비용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적은 가격대로 변했기 때문이다. 취업 이후의 중장년층보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젊은 층들은, 해외여행 소요경비가 알바로도 충분히 경비를 벌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떨어지자 국내여행을 떠날 돈에 약간을 보태서 해외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떠난 해외여행에서 보고 얻은 이국적인 풍경, 새로운 경험, 더 많은 나라를 방문해 보고 싶다는 갈망은 이들이 계속해서 해외로만 떠나도록 만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외여행을 떠날 경우 이미 관광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고, 문화 컨텐츠가 풍부하며, 관광 인프라가 잘 구축된 해외의 메인 도시 혹은 명승지나 문화재가 위치한 관광 도시에 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국내 여행을 떠날 경우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권에 비해서 교통이나 숙박 등 모든 여건이 부실한 곳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고, 이는 국내여행에 대한 실망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실망감과 불편함을 이겨낼 만한 대단한 자연경관, 문화재, 그리고 도시문화컨텐츠를 가진 도시는 국내에 많지 않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이들이 취업을 하고 금전적 여건이 더욱 개선되었을 때에도 이들은 해외의 또 다른 여행지를 찾아 나설 뿐, 국내로 눈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여행 수요를 책임질 젊은 층의 여행 트렌드는 과거와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다. 과거의 여행 키워드였던 자연경관이나 명승지로 떠나는 것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도시 여행’ 이라는 여행 방식을 더 많이 실행하고 있다. ‘도시 여행 트렌드’란, 대단한 자연경관이나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도시에서의 생활과 문화 컨텐츠를 만끽하는 여행을 뜻한다.(2) 에어비앤비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대표 카피와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도쿄에 가서 아사쿠사의 큰 절에 찾아가기보다 지유가오카의 작은 편집숍을 찾아가거나, 유명한 맛집에 가기보다 숙소 가까이에 있는 동네 슈퍼에서 지역의 식재료를 사다가 요리해보고, 먹어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이런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굳이 대단한 자연경관, 명승지가 없는 지역도 해당 지역만의 문화 컨텐츠가 있다면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미슐랭 별 세개짜리 식당처럼 독보적인 가치를 가진 컨텐츠는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부른다.(3)
즉, 이렇다 할 대단한 관광 명소가 없는 도시일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도시 문화 컨텐츠를 개발 보존하고,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가 마련된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관광 수요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모든 국내 행정구역에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이다.
이번 통영 여행에서는 그러한 트렌드를 직접 보았다. 통영은 이미 도시 문화 컨텐츠가 많이 개발되어 국내 관광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도시이다. 통영의 동피랑 언덕은 국내 도시재생의 성공적 사례로 손꼽힌다.(4) 단지 ‘한려수도국립공원’만으로는 조금 부족했던 도시의 매력을 동피랑이 채워주었고, 여기에서 찍은 소위 ‘인생샷’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퍼지면서 통영으로 떠나는 여행객이 늘어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체험하고 왔던 ‘한산도 버스 한 바퀴’나 ‘서피랑 버스킹’, ‘연화리 카페에서 석양 보기’ 같은 컨텐츠가 조금 더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대대적으로 홍보된다면 통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더 오래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컨텐츠들이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번 여행에서 단순히 운이 좋아 언급했던 컨텐츠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만약 여행지 선정 과정에서 ‘통영에 가면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통영으로 떠났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산도 버스 한 바퀴’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본래 비진도에 가려던 일정이었는데 풍랑이 거세 비진도행 배가 뜨지 않아 유일하게 운항하던 한산도행 배를 탄 것이다. 배에 내렸는데 버스가 한 대 서 있길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올라타고, 무작정 몽돌 해변으로 향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해변까지 오래 걸렸고, 다시 통영시로 돌아가는 배를 타려면 같은 버스를 그대로 탄 채 돌아와야 했다. 버스 기사님께 돌아보니 한산도에는 버스가 이것 한 대뿐이고 배 시간에 맞춰 버스가 섬을 한 바퀴씩 돈다고 그제서야 말한다. 원래 그 정보를 알았다면 애초에 한산도는 버스 타고 한 바퀴 돌아보자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입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에 탈 때부터 버스에 올라타고 돌아오는 배를 다시 탈 때까지 계속해서 마음 한 부분에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운이 나빠 어느 한 부분이 틀어졌으면 여행을 망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산도를 둘러싼 바다는 정말 아름답고, 봄날의 한산도는 바다를 따라 벚꽃길이 생긴다. 버스를 타고 둘러보면 다리도 아프지 않고, 편하고, 올라타고 내리는 섬의 주민들과 같은 공기를 공유할 수 있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작은 마을들은 레고로 만든 집처럼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데다가, 새로 페인트칠을 했는지 새하얀 벽과 원색의 지붕은 바다와 하늘의 푸른 색과 대비되어 시각적으로 엄청난 즐거움을 준다. 해안가에 정박된 낚싯배는 이곳이 섬마을임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해 주고, 어느 순간인가 한산도의 아름다운 모습, 즉 한산도가 지닌 컨텐츠는 ‘이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한다. 마음의 불안감이 없었다면 더 즐겁게 이곳을 즐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정확한 배 시간과 버스의 경로를 안내한 관광객용 책자 하나면 이룰 수 있다. 이 간단한 것이 없어서, 한산도는 관광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운이 좋은 몇 명만 ‘불안한 마음과 함께’ 보고 돌아간다.
국내 도시도 자유여행의 목적지로 충분히 매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다. 정보 검색 능력이 있고, 운이 좋은 사람에 한해서만. 잠재 국내여행 수요를 수면 위로 올리기 위해서는, 간단하다, 타지에서 온 여행객의 불안감을 줄이고 정보 접근성을 높이면 되는데 관광 인프라 구축과 도시 마케팅으로 가능하다. 나아가서 해외여행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서는 여기에 문화 컨텐츠를 얹으면 된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한산도의 모습을 시원한 스페셜티 아메리카노와 즐길 수 있다면? 매력이 더해진다. 한산도의 자연을 바라보면서 시금치 프리타타에 수제맥주를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면? 게다가 그 레스토랑은 바다에 바로 면해 있는데, 식사를 한 손님들에게 식당이 보유한 투명 카약을 타고 잔잔한 한산도 앞바다에 둥둥 떠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상상해보자. 나라면, 이 경험을 위해서라도 통영을 방문할 마음이 들 것 같다. 한산도에 가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어떤 루트로, 어떻게 가면 할 수 있는지 서울의 우리 집에 앉아서도 알 수 있다면.
(1) 유커 줄고, 韓 해외로…작년 관광수지적자 14.7조원, 사상 최대, 연합뉴스, 2018.2.2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2/20/0200000000AKR20180220050200030.HTML?input=1195m
(2) <골목길 자본론>, 모종린, 2017.11.20
(3) 미슐랭 스타의 최고 개수인 세 개는 요리가 매우 훌륭해 그곳을 가기 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으로 여겨진다.
(4) 낙후된 달동네 오명 벗어나 지역 대표 명소로, 전남일보, 2017.07.17 http://www.jnilbo.com/read.php3?aid=1500217200528004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