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2일차)
그렇게 잘 잤던 것 같지는 않지만 와라즈에 도착하긴 했다. 제일 유명하다는 아킬포 호스텔에 묵기로 마음먹고, 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라길래 걸어서 움직인다. Oltursa 버스터미널에서 내린 후에 오른쪽으로 쭉 걸어오면 있다길래 쭉 걸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나는 Cruz del sur 버스를 타고 왔었다. 길에 잠시 멈춰서서 혹시 아킬포가 어디있냐 물어보니까 잘 모르겠다며 구글 맵에 검색해보라고 탭을 건네준다. 그래서 검색해봤더니 걸어서 10분쯤 걸릴 거리. 나한테 탭을 빌려줬던 사람이 내 짐을 보더니 태워다 줄테니 타라고 한다. 왠지 돈 달라고 할 것 같았지만 짐이 무거워서 까짓 돈 주기로 하고 차에 올라탄다.
차로 오니까 정말 가깝고 3분만에 도착했다! 이제 돈 달라는 말만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는 잘 가라는 인사만 건넨다. 왠지 내 스스로가 썩은 느낌이라서 가방에 있던 매운 새우깡을 건넸다. 스낵 프롬 코리아. 쉬림프 스낵.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젓길래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주니 무차스 그라시아스, 인사를 하고 떠난다. 나도 길을 건너 아킬포 벨을 눌렀다.
어차피 로빈이가 오려면 20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넉넉히 머무르려고 일단 5박 묵겠다고 말했다. 1박에 24솔(8300원)을 부르는데, 나 5박이나 하고 투어도 여기서 할 거니까 싸게 해 달라고 하니까 투어 두 개에 5박 요금을 175솔을 부른다. 투어가 70솔이니까, 1박에 21솔(6800원)에 묵는 거다. 1박에 7천원이라니, 부산에 갔을 때 골목 골목 들어가서 침대가 삐걱거렸던 게스트하우스가 1박에 2만원 받았던 것을 생각하니 엄청난 이득을 본 기분이다. 이 정도 가격이라면 여기서 열흘은 더 머물러도 될 거 같았다.
미리 연락했었던 분과 조식을 먹으면서 내일 69호수 투어를 같이 가기로 약속한다. 그 분이 빙하투어를 가느라 호스텔을 떠나고 혼자 남아 코카차를 마시면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린다. 코카차가 고산병에 좋다던데 그래서 마시는 건 아니고 녹차보다 좀 더 고소한 맛이 있고 향이 되게 좋다.
체크인을 하고 샴푸를 꺼내려고 캐리어를 열었는데 향긋한 꽃 냄새가 난다. 전에 잠깐 향수를 넣어 뒀었던 적이 있는데 그거 때문인가 하고 샴푸를 꺼내는데 찐덕한 것이 손에 묻는다. 캐리어에 짐을 꽉꽉 눌러 담았었는데 8시간 비행 8시간 버스를 거쳐오면서 캐리어 안에서 샴푸가 터져버렸던 것이다. 미국 경유할 때 녹차가루 봉지 터졌던 건 그냥 털어내면 돼서 정신적 타격이 적었는데 샴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동안 생각이 정지됐다.
버리기 아까워서 챙겼던 수북한 노트들, 샴푸가 덕지덕지 묻은 신발과 화장품을 담아 두었던 비닐봉지들, 혹시 우산을 잃어버릴까 싶어 여분으로 가져왔었던 우산 등 샴푸 덕분에 무거웠던 짐을 4kg 가량 줄일 수 있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무겁게 다 짊어지고 다녔을 텐데 이 기회에 버리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려나. 샴푸가 묻은 화장품 통이나 고데기도 물로 잘 닦아내고 나니 남은 건 캐리어에 수북이 쌓여 있는 샴푸의 잔해들이었다. 이걸로 머리를 감으면 2주는 감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처음에는 캐리어를 물로 씻어내서 말려둬야 하나 했는데 그동안 그 안에 있던 짐을 놓아둘만한 공간도 없고 캐리어가 28인치짜리라서 씻어내기도 불편했다. 일단은 물티슈와 휴지로 캐리어 안의 샴푸 덩어리들을 닦아내고 캐리어를 약간 말렸다. 그리고 호스텔에서 커다란 비닐봉지를 하나만 달라고 해서 (리셉션 : 그거 10솔(4천원)이야! /나 : 에이 공짜 공짜~ /리셉션 : 하하 퍼니 걸~ /나 : 땡큐~~) 샴푸가 묻은 쪽 캐리어 바닥에 깔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캐리어 가장자리에 테이프로 비닐봉지를 붙이고 나니 적당히 쓸만해 보였다. 이 상태로 두 달을 들고 움직여야 한다니 약간 절망스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캐리어를 임시로 처리해 놓고, 샴푸가 묻어서 비닐봉지들을 버렸기 때문에 신발을 넣어 둘 비닐봉지를 찾으러 밖에 나갔다. 고산병 약도 살 겸 약국에 들러서, 내가 산 건 겨우 알약 세 알이지만 신발이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비닐봉지를 두 개 받아왔다. 한숨 돌리고 지도에 맛집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고, 숙소에 돌아와 낮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내일 69호수 투어를 가기로 예약하고, 동행자 언니와 저녁에 라면을 먹기로 했다. 여기 있는 동안 얼른 먹어치워서 짐을 왕창 줄여서 가야지. (샴푸가 또 터지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