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림 Nov 05. 2019

영원이 새겨진 규화목의 숲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 Petrified Forest

새가 사뿐히 앉았다 날아간다. 조그마한 날갯짓에도 바람이 인다. 그 작은 공기의 흔들림에 티끌이 날린다. 그렇게 파이고 파여서 커다란 산 하나가 사라졌다. 불교에서 말하는 ‘겁’의 시간이다. 영원 같은 겁의 시간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구의 역사를 간직한 대자연을 여행하다 보면 인간이 가늠하기 힘든 세월을 느끼곤 한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를 거닐며 아주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해는 서서히 떨어지는데 마음이 바쁘다. 캠핑카의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옆모습에서 초조함이 느껴진다.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 국립공원이 문 닫기 전에 서둘러 가는 길이었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아직 문이 열려 있다. 미국 국립공원의 연간회원권을 보여주고 아슬아슬하게 입장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잿빛을 띠는 갈색 땅에 누렇게 마른 풀이 듬성듬성 나 있다. 풀 더미 사이로 쓰러진 나무 파편들이 눈에 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잔하게 퍼져 있다. 모든 게 멈춰 있는 듯 신비롭다. 화마나 전쟁이 아닌, 세월이 훑고 지나간 자리다. 폐허 같은 풍경이 마음에 파고들어와 꽂힌다.   


“어, 나무가 아니잖아.” 

지호가 바닥의 나무 조각을 줍더니 깜짝 놀란다. 잘리거나 쓰러진 나무들은 멀리서 보면 나무 같지만 가까이서 만져보면 단단한 돌덩이다.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는 나무가 화석으로 변한 페트리파이드 우드를 보존하는 지역이다. 우리말로 ‘규화목’이라 부른다. 200만 년 전부터 수명이 다하거나 쓰러진 나무들이 진흙이나 모래, 화산재 등 각종 침전물에 덮여 암석으로 변해갔다.      

공원 비지터 센터 입구에는 지호 허리춤에 이르는 규화목의 단면이 깔끔하게 잘린 채 놓여 있다. 실내조명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값비싼 이탈리아산 대리석이 이런 느낌일까? 규화목을 가공하면 대리석이나 화강암 같은 질감이 난다. 지호는 매끈하게 가공된 규화목의 촉감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밖으로 나가자 얕은 언덕이 보인다. 규화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때때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목도 눈에 띈다. 겉에서 보기에 영락없는 나무다. 짙은 적갈색의 나뭇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갈라져 있는 단면에는 빨간색, 검은색, 흰색, 갈색이 섞여 오묘한 빛을 낸다. 돌처럼 굳어 버린 나무의 단면은 울퉁불퉁하고 거칠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원석처럼, 갈고 닦는다면 언제든 매끈한 질감을 드러낼 것이다.      

이 나무들은 나이테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박제된 사슴처럼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다. 아니, 그 내면은 오랜 세월 끊임없는 화학작용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바닥을 자세히 보니 땅에 뿌려진 고운 입자도 흙이 아니라 규화목의 조각들이다. 규화목이 잘게 부수어진 가루들이 흙처럼 땅에 뿌려져 있다.  규화목은 보기보다 무겁고 단단하다. 하지만 작은 나뭇조각처럼 보이는 규화목들은 아직 가볍고 무르다. 사춘기 소년처럼 나무와 돌 사이에서 힘겨운 정체성의 변화를 겪고 있는 듯했다. 


해가 넘어가자 희끗희끗한 하늘이 파스텔 톤으로 물들었다. 지구인지 우주인지 알 수 없는 풍경도 점차 어두워졌다. 다시 캠핑카를 타고 국립공원 밖으로 나오면서 어딘지 모르게 아쉬웠다. 

그리고 반년 뒤 루트66을 타고 미국을 횡단할 때, 또 한 번 페트리파이드 우드에 갈 기회가 생겼다.  두 번째 방문에는 그곳을 더 느긋하게 걸어 보기로 했다. 눈과 비바람을 뚫고 미국 중부를 지나온 끝에 모처럼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가뿐하다. 밖에 나오자 따뜻해진 날씨에 마음도 한결 느슨해졌다.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를 향해 곧게 뻗은 길을 달렸다. 앞에 육중한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가는 남녀 커플이 보인다. 뒷모습만 봐도 포스가 범상치 않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도 치렁치렁한 가죽 재킷과 꽉 끼는 가죽바지를 챙겨 입는 스웨그가 뿜어져 나온다. 바이크 커플이 입구에 멈췄다. 

“저 사람들 퀘벡에서 왔나 봐. 대단하네.” 

남편이 번호판을 보고 알아챘다. 캐나다 퀘벡에서 뉴멕시코까지는 직선거리로만 3,7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멋진 바이크 커플을 앞세워 들어온 국립공원 안에는 우리처럼 가족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온 이들도 많다. 캠핑카에서 내려 다시 한번 규화목이 놓여 있는 땅을 밟았다.    

하늘은 화선지에 잉크를 찍은 듯, 깃털 같은 구름 사이로 짙은 파랑이 배어 나온다. 까마귀가 이따금 소리 내어 울며 날았다. 적막한 줄만 알았던 땅에 생기가 감돈다. 지호는 땅에 떨어진 규화목 조각들을 오랜만에 만지작거리며 반가워했다. 땅속에 묻혀 있던 퇴적층이 지상으로 올라온 작은 산이 나타났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퇴적층이 보인다. 갈색의 은은한 그라데이션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지호는 이곳에서 중요한 미션을 수행키로 했다. 두 번째 방문을 기념해서 주니어 레인저에 도전하기로 한 것. 미국 국립공원에서는 ‘파크 레인저’라고 해서 공원을 지키는 직원들이 상주한다. 어린이들은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면 ‘주니어 레인저’로 인정해준다. 해당 국립공원에 비치되어 있는 문제지를 풀고 검사를 받으면 된다. 간단한 선서를 마치고 국립공원 문양이 새겨진 특별한 배지를 얻을 수 있다.      

비지터 센터에서 문제지를 받아 왔다.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공원에 따라 다르지만, 지호처럼 만 5세 이하인 아이들은 대개 문제지에서 3~5개의 문제만 풀면 된다. 지호는 캠핑카 테이블에 앉아서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아직 알파벳만 쓸 줄 아는 지호에게 조금은 어려운 미션이다.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연필을 쥐고 꼬불꼬불 알파벳을 그려갔다.      


마지막 질문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자연보호를 위해 무엇을 하겠냐는 물음이다. 지호는 한참을 고민했다. 

“엄마 뭘 하면 좋지?” 

“음,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프리스쿨에 다닐 거 아냐. 그럼 친구들을 만나겠네?” 

“응. 친구들한테 이야기해줄래.”      


국립공원을 지키는 백발의 파크 레인저는 지호의 문제지를 검토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호는 긴장된 얼굴로 선서를 따라 했다. 기대하던 배지를 받는 순간, 비로소 입꼬리가 쓰윽 올라가며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후에 노스캐롤라이나에 돌아왔을 때, 프리스쿨에 가서 친구들에게 주니어 레인저 배지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 약속을 지킨 셈이다. 주니어 레인저가 된 덕분에 지호는 페트리파이드 포레스트라는 그 어려운 이름을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하게 됐다. 

“지호야, 여기 돌을 보면 어때?” 

“엄청 특이해. 나무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해.” 

“이 나무들은 수백 년 수천 년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돌로 바뀌었대.” 

“그래? 그게 얼마나 오래야?” 

“엄마가 할머니 되고 지호도 엄마처럼 자라서 할머니가 되고, 그렇게 한참 더 지난 후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화목에 남아 있는 나이테처럼, 아이와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의 어딘가에 새겨지고 있을 것이다. 나무가 돌로 바뀌듯 격렬한 화학작용을 서서히 거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 여행은 너에게, 나에게 어떻게 남아 있을까? 

https://tumblbug.com/roadtrip/story


매거진의 이전글 이국적인 너무나도 이국적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