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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화그리는목각인형 Aug 18. 2021

호우시절

페이창펀(肥腸粉)

  사흘.


  오늘을 놓쳐버리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   

   

  유학 시절 서로 설레었으나 사랑인지 미처 확인할 기회도 없었던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 <호우시절>.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덕혜옹주>로 알려진 허진호(1963-) 감독 작품이다.  


  <호우시절>은 원래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 


  중국 영화사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를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영화 세 편 가운데 한 편을 허진호 감독에게 부탁했고, 허진호는 청두를 다녀온 뒤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서 장편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 영화이다.  


  이 영화는 다시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주는 허진호식 판타지이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건설중장비회사 팀장 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나무가 우거진 엽서 사진을 본다. 


  동하는 마중 나온 지사장이 권해 청두 토속 음식인 페이창펀(肥腸粉)을 맛보다 뱉고 만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당면이나 국수에 숙주를 넣고 돼지 곱창 삶은 물로 토렴한 뒤 청산초, 소금, 간장, 고추기름인 홍유, 절인 음식인 자차이, 쪽파, 셀러리, 돼지 곱창을 넣은 이 음식은 여러 가지 향신료와 곱창 냄새 때문에 처음 먹는 사람은 한입 삼키기도 어렵지만, 중국 모든 지역에서 많이들 먹는 음식이다. 

페이창펀 ⓒ tvN D ENT

  시간이 남은 동하는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찾아간다. 


  중국 최고 시인 두보 초가가 있는 곳으로 동하가 엽서 사진으로 본 그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관광안내를 하는 메이(가오위엔위엔)와 기적처럼 다시 만난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동하와 메이는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나 서로 좋은 감정을 품었었지만, 실제 연인이 되지는 못했다. 


  기분 좋게 먹고 마시며 지난 일을 떠올리는 둘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가졌다는 점에 살짝 당황한다. 


  동하가 주고 간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 팔았다는 메이.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줬었다는 동하와 기억나지 않는다는 메이. 


  끊어진 끈을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동하는 친구에게 메이가 자전거 타는 사진을 찾아서 보내달라고 한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출장 둘째 날 둘은 저녁을 먹는데 페이창펀을 잘 먹는 사람이 좋다는 메이 말에 동하는 억지로 먹는다.


  국적이 다르니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고 그건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먹지 못하는 음식을 그 사람은 좋아한다면 어떨까? 


  사랑한다면 못 먹는 음식은 이해해줘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도 폭력일 테니.


  저녁을 먹고 나온 둘은 공원에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며 동하가 시인이 될 줄 알았다는 메이. 


  처음부터 널 사랑했다고 이제라도 보여준다면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고 묻는 동하에게 메이가 말한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두보 시 ‘춘야희우(春夜喜雨)’ 첫 구절인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영화 제목을 따왔다더니 대사도 시를 읊는 듯 감미롭다. 


  동하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고 미적지근한 말만 남긴 채 떠나갔던 메이. 


  동하가 휴대전화로 보내준 자전거를 탔다는 증거들.


  메이는 일을 뒤로한 채 두보 시집과 선물을 사서 공항으로 오고 이에 동하는 메이를 다시 놓치지 않으려 하루 더 머물기로 한다. 


  짐을 풀러 간 호텔에서 둘은 애틋한 감정이 들지만 메이가 막는다.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다시 만난 사랑은 그만큼 다가가기가 어렵다. 


  다음 날 동하를 공항으로 데려다주던 메이는 교통사고로 입원한다. 


  동하는 메이 상사로부터 메이가 결혼을 했으며 남편이 쓰촨 성 지진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동하는 페이창펀을 먹지 못했으나 다시 만난 메이에게 잘 보이려 참고 먹는다. 


  페이창펀을 좋아했던 남편 영정 앞에 정성스레 끓인 페이창펀을 올리며 슬피 우는 메이. 

ⓒ 판씨네마(주), Zonbo Media, 영화사 호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다시 마음에 들어오는 동하 때문에 미안함도 있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다시 만난 사랑이 상처가 되지 않게 한다. 


  한쪽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이제 메이는 김치 냄새가 싫지 않을 테고 동하는 메이가 끓여준 페이창펀을 맛있게 먹지 않을까 한다.     


  春夜喜雨춘야희우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내릴 때를 알아

  當春乃發生 봄이 되니 때맞춰 내리네

  隨風潛入夜 바람 타고 밤중에 몰래 찾아와    

  潤物細無聲 소리 없이 축축하게 만물을 적시네

  野徑雲俱黑 들길도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두운데

  江船火燭明 강에 뜬 배 불빛만 홀로 밝아라

  曉看紅濕處 새벽에 붉게 물든 곳을 바라보니(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 금관성(청두 옛 이름)에 붉은 꽃들이 활짝 피었네


  한 구가 다섯 글자로 된 오언율시인 ‘춘야희우’는 ‘봄밤에 내리는 단비’라는 뜻이다.


  시성으로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는 내내 낯선 곳을 떠돌았고 그 때문인지 몸에 병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이 시를 지을 때가 두보 나이 쉰 무렵으로 쓰촨성 청두에 두보초당을 짓고 머물 때였다. 


  두보는 농사를 지었는데 그래서인지 봄비에 대한 반가운 느낌이 더욱 깊었던 듯하다.


  중국 문학사에서 두보 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까닭은 시 속에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 아픔이 녹아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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