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한 뒤 일주일이 지났다. 단 하루도 야근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정시 퇴근에도 눈치 주지 않는 분위기라 했다. 난 이것이 아주 드문 행운임을 알고 있다. 이미 숱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기꺼이 1시간 초과근무를 해도 회사를 나올 땐 뒷덜미가 켕긴다. 전 직장에선 퇴근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상사가 있었다.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는데 얼마나 정나미가 떨어지던지, 회사 문턱을 넘어서부터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야근하는 동료는 스스로 억울해하면서도 ‘너는 왜 안하냐’는 무언의 책망을 보냈다.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사회생활의 지혜라는 걸 나는조금씩 배워 나갔다.
직장인 친구들 사이선 ‘시간’이 화두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회사가 일하는 곳이 아닌 하루 24시간을 두고 벌이는 시간투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정규 근무 시간에 처리할 수 없는 업무량을 던져주고 ‘요령껏 해보라’는 사내문화는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저녁 약속이라도 있는 날은 정시 퇴근을 위해 오줌보 터지기 전까지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일해서 퇴근하면 약속이고 뭐고 몸이 축축 쳐지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일이란 뭘까. 밥벌이란 뭘까. 감내하고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회사도 돈을 벌고, 우리도 돈을 벌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리 없잖아. 그것으로 괜찮을 리 없잖아. 열심히 산다는 게 뭔가 싶다. 밤샘근무와 야근으로 자신의 열심을 증명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한편 시간에 인색한 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문득 깨달은 게 있다. 요가학원 시간표를 보면 저녁 타임으로 갈수록 레벨이 높아진다. 난이도가 낮은 힐링, 릴렉스 수업이 이른 시간에 배치된 반면, 아쉬탕가 풀타임, 파워 빈야사 같은 심화 과정은 반드시 마지막 수업이다. 밤 10시 반에 끝나는 이 수업들은 당연히 직장인들이 대상인데 회사서 종일 일하고 와서도 가장 열성인 건 그들인 것이다. 그렇게 쏟아내듯 요가하고 집에 가면 자정이 되어서야 몸을 눕힐 수 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인데 오늘은 선생님께 혼이 났다.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리냐고. 근데 살짝 억울했다. 욕심을 부렸다기보다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그 습관적인 ‘열심’이 늘 자신을 내몬다.
되돌아보면 가장 만만한 게 시간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포기하고, 이동하는 시간을 아끼면서, 촌각을 다투며 사는 게 열심히 사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이 별 건가. 결국 시간으로 이뤄진 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제 시간을 포기하면서 자기인생을 산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는 말하자면 늘 시간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세계가 방해받지 않고 자기 고유의 시간 속에 그대로 있을 때, 세계가 가만히 서 있을 때, 비로소, 하이데거에 따르면 ‘들길이 건데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신의 언어로서 들리게 될 것이다.”
즉 ‘시간의 향기’가 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