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때 밀리는 줄 알았네.”
요가 수업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는데 옆 요기니가 말했다. 푸하하하, 일동 웃음이 터지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 보며 우린 또 한 번 웃었다. 스튜디오엔 바람 한 점 없다. 그 흔한 환풍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꼭 사우나를 빠져나온 것처럼 모두가 기진맥진하다. 옆 요기니는 연신 땀을 닦아내느라 바쁘고, 난 축축이 들러붙은 요가복을 벗느라 낑낑댔다. 그래, 여름이구나. 습하고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장마철 여름. 여름의 절정을 지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계절이란 게 참 재밌다. 겨울엔 요가할 때마다 맨발이 시려 혼이 났는데, 여름엔 이렇게 더위와 싸우고 있다. 꼭 누군가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난 이토록 농후한 계절이 좋다. 볼 따귀를 후려치는 겨울 칼바람에 크하하하, 웃음이 나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한여름 매실차를 마실 때 행복해지는 것이다. “더워, 더워” 하면서 더위를 지나고, “추워, 추워” 하면서 추위를 지날 때 나는 가장 정직하게 시절을 살아내고 있다고 느낀다.
여름엔 창문을 활짝 열어둘 수 있어 좋다. 어릴 적 우리 집 옆엔 큰 변전 탑이 있었는데, 수년 전 그 변전 탑이 사라지면서 무성한 나무들이 들이찼다. 그 덕에 하루 종일 새소리가 들린다. 뽀로로로 뽀로로로. 저 새는 왜 우는 걸까. 무엇을 부르는 걸까. 여름 한낮, 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새의 마음을 기웃거렸다. 해 질 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계 없이 뻗은 가지와 잎들이 뭔가에 큰 공감을 이루듯 일제히 흔들리면 내 속의 가장 명랑한 기운도 더없이 푸르러진다. 짙푸른 여름의 마음이 된다.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는 여름을 보내는 의식으로 ‘불온한 바람이 부는 태풍’을 좋아한다고 했다. 불온한 바람과 태풍. 계절을 담은 문장은 언제나 근사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들.
태풍이 몰아치는 밤에는 세상이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비바람을 맞는 집들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물체처럼 징그러워 보인다. 어린 시절에는 태풍이 오면 덧문을 꼭꼭 닫았다. 덧문은 창살이 전부 나무로 되어 있어 온 방에 눅눅한 냄새가 고였다. p.27
불이 꺼지면 소리와 냄새가 선명해진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비바람을 바라본다. 감각이 활짝 열리고, 그렇게 밖을 내다보면 몸은 방 안에 있는데 감각만 두둥실 바깥으로 나가 비에 흠뻑 젖는다. 시원하고 상쾌해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p.28
<우는 어른>, '비가 세계를 싸늘하게 적시는 밤' 中
계절의 순환을 생각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어떠한 게으름도 변명도 없이, 매 순간 변하고 나아가면서 동시에 언제든 돌아오니까. 여름은 다음 여름으로. 겨울은 다음 겨울로. 어쩐지 안도할 수 있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늦어진 장마에 목마른 나무들은 신이 나고, 푸르르 몸을 떨며 "아고오- 좋다",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습하고 더워지면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그러나 짙은 계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삶의 색채도 더욱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그런 계절의 풍경들을 놓치지 않고 소중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