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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mu Jul 30. 2017

027 버리지 않고는

요가 책을 읽다가 수카(sukha)와 두카(dukha)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좋은 공간'과 '나쁜 공간'을 의미하는데, 전통요가는 수카보다 두카를 우선한다고 했다. ‘둑을 터서 물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흐르게 하는 농부’처럼 허약하거나 경직된 부분(두카)을 발견해 해소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심신은 자연히 수카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하지 않고 빼는 것. 취하지 않고 버리는 것. 만들지 않고 비우는 것. 그러면서 자유롭고 새로워지는 것. 이것은 삶의 이치와도 맞닿아 있다.   


문득 내 마음의 두카(dukha)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혼자 끌어안고 있던 마음의 짐들, 고여 썩히던 과거의 찌꺼기들. 단단히 굳어버린 편견과 아집들 말이다.   


먼저 고생하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코 편안하지 못한 그들의 노후와 아등바등한 일상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동정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 부채감과 죄스러움이 내 안에 혼재돼 있다. 오직 자식들을 위해 사느라 바위처럼 굳어버린 그들의 몸과 마음을 나는 어떻게 풀어드릴 수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건 나의 행복일 텐데 난 그들의 불행에 꼼짝없이 매달렸다. 엄마, 아빠의 고생을 마음 한편에 쌓아두고 결코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함께 버거워했던 것이다. 욕심 많고 야무진 둘째 딸, 내리 전교 1등을 하며 방송 PD를 꿈꾸던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자 '환상'이었다. 하지만 대학입시도, 취업도, 다들 하는 결혼도 뭐 하나 시원치 않으면서 난 되레 부모님께 실망과 낭패감을 안겼다. 


어쩌면 나는 부모님의 불행을 통해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으로, 자신의 터무니없는 인정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그럴싸한 꿈과 목표에 매달린 것이다.


이제 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나는 가혹해질 마음도, 변명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바라는 건 분수 모르고 짊어지고자 했던 부모님의 아픔, 상처를 내 안에서 털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내 욕망을 멋대로 두 분의 삶에 투영하면서 지금 당장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힐링을 찾아 요가를 시작한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무진장 아프고, 멍청한 몸뚱이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요가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건 '삐뚤어진 척추와 굳어진 어깨, 얕은 호흡과 잘못된 습관, 성급함과 오만, ' 그런 나의 못난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인정하고 버리고 새로워지는 것. 그것이 요가를 통해 내가 배워가야 할 삶의 지혜들이 아닐까.


난 아마 나이를 먹고 먹어도 상처받을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길을 잃고 두리번거리다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직할 수 있다면, 나 자신에 아첨하지 않고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면, 버리고 나아갈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가는 우리의 신체로부터
클레샤(klesha,고통)을 식별해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요가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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