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길을 떠난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길게 뻗은 ‘빤 아메리카나’ 고속도로를 달린다. 고속도로 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능선을 타고 하염없이 펼쳐진다. 사막 중간에는 생명이 살까 싶을 정도로 허름한 움막들이 마을을 이루었고 굴뚝이 즐비한 공장들도 가끔 보였다. 메마른 땅에 물길 하나 보이지 않는데 포도나무가 길게 심어져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땅에 대한 애착은 사막의 땅, 죽은 땅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이 척박한 땅덩어리도 주인이 있는지 누군가의 영역을 표시해 놓고 줄로 잇고 막대기도 꽂아놓았다. 물 하나 없는 사막에서 포도가 자라고 있다는 것은 땅 주인이 어딘가로부터 물길을 끌어와서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이다.
얼마 전이었다. 포도밭 한 밭뙈기를 덜렁 계약하고 말았다.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두어 번 밭에 가 보고는 마음에 든다고 남편과 의논도 하지 않았다.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는 밭이었다. 밭주인은 이십 년 넘게 복숭아 농사를 지었는데 올봄에 큰 수술을 하고선 일을 줄여야겠다고 땅을 내놓았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고 계약서는 썼지만 남편한테는 알리지 못했다. 다른 일을 벌여놓은 상태였고 노동이 많은 농사를 겸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대금은 어떻게 치를 것인지, 복숭아를 뽑아내는 작업은 누가 해 줄 것인지, 포도 하우스를 짓는 일은 누구한테 맡길 것인지, 포도는 어떻게 심을 것인지에 대한 계획도 없이 덜컥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영농조합 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이 수확한 복숭아와 포도 곶감 등을 수출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샤인머스켓이 주 품목이 되었다. 이 포도는 씨가 없고 껍질째 먹는 과일이며 당도가 높아서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수출을 보내는 첫해에는 농가에서 포도를 손질하고 선별한 다음 망을 씌우고 박스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 농민들이 선별 작업을 해 오면 그대로 팔레트 작업만 해서 외국으로 보냈다. 비행기를 타고 하루 이틀이면 현지에 도착해 마트와 백화점과 일반 가게로 운반되었다. 포도가 현지에 도착해서 검역을 받아야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바이어가 수십 개가 넘는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왔다. 클레임이 걸린 곰팡이가 슬었거나 탄저가 걸린 사진 속의 포도를 보고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일이 한두 번으로 끝났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몇 번이나 이어졌다.
포도 알맹이가 터진 것과 송이가 고르지 못하고 크고 작은 것이 섞여있었다. 온도 차이가 나서 곰팡이가 확 번진 것도 있었다. 특품이 되지 못한 농산물을 수출 보내면 클레임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무게가 일정해야 하고 퀄리티가 좋아야 하며 당도도 높아야 했다. 수출은 나라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일하는 농민 대부분이 연세가 많다 보니 선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카톡이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자다가도 카톡 카톡 하는 소리만 나도 또 무슨 하자가 있을까 하며 두근거렸다. 그해는 포도 수출이 끝날 때까지 가시방석이었다. 보낼 때마다 포도에 하자가 생기니까 회사의 이미지가 마이너스가 되었다. 속이 상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포도 농사를 내 손으로 지어서 선별작업까지 한 다음 수출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포도 농사를 지어서 수출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수출 보낼 날자가 정해진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펑크를 냈다. 비행기 예약과 더불어 모든 운송이 취소되고 다 물어준 것도 모자라 바이어와의 신용이 떨어진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됐다.
막상 땅을 계약하고 보니 막막한 순간에 놓였다. 시작하고 보니 여러 난간이 많았다. 계약금은 조금의 여유 자금이 있어서 지불했지만 잔금이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남편에게 알렸다.
남편은 잔금을 맞추는데 애를 먹었다. 하천부지가 딸린 밭이라 대출이 쉽게 되지 않아서 은행 몇 군데를 전전해야 했다. 이자를 비싸게 쓰면 대출을 낼 수 있다기에 그 방법을 썼다. 한 달에 들어가는 이자가 만만찮았다. 게다가 포도 비가림을 지으려고 견적을 내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 추가가 되었다. 나는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계획도 없이 덜컥 일을 저질렀다. 그 바람에 남편이 안절부절 곤혹을 치렀다.
남편은 내 삶에 있어서 물길이었다. 어떤 일이든 앞뒤 분간도 못하고 일을 저질러 놓으면 정리해 주는 사람이 그이였다. 그는 나에게 타일렀다. 다음부터는 새로운 일을 만들지 말고 하던 일만 잘 하자고. 하지만 나는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맞닥뜨린다면 그 일을 또다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사막의 척박한 땅에서도 포도가 자랄 수 있도록 누군가 물길을 끌어왔듯이 내 옆에도 소중한 물길이 놓여 있었다. 그 물길이 잘 뻗쳐나가도록 옆에서 길을 잘 터야 하리. 새롭게 시작하는 샤인머스켓 농사는 다른 농민과는 차별화를 두고 지을 생각이다.
이른 봄 포도 순이 올라오면 뻗친 가지를 붙들어 메고 잘 자라게 고정시킨다. 무더운 여름엔 이파리 사이로 햇볕을 받고 바람을 맞으며 포도가 알알이 익어간다. 가을로 들어서자 열매가 오종종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겨울엔 이파리 다 떨어지고 빈 가지로 남지만 내년 봄을 위해서 겨울잠을 잔다.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그때마다 척박한 땅 사막의 물길을 떠올린다. 그러면 농사짓는 고된 하루하루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