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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cstory Dec 04. 2016

11화.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얼음의 땅,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에서 겨울나기

반팔차림으로 이 나라에 왔는데 두꺼운 점퍼를 입어야 하는 겨울이 왔습니다. 제 힘으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던 아가는 이제 집안 곳곳을 기어다닙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핀란드어가 들리고, 보이지 않던 길가의 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네의 지도를 대략적으로 머리에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수퍼마켓에 가면 좋아하는 과자나 음료수도 이젠 자신있게 고를 수 있게 됐습니다.

길가에 얼어붙은 이름 모를 나무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과 다른 건 겉보기엔 멈춘듯한 시간도 부지런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지나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제법 하루와 한주의 스케줄이 정착되면서 현실에서의 삶을 살아내다보니 정기적으로 글을 써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 차일피일 늦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멈추어진 공간에 지난주부터 방문하는 분들이 갑자기 늘고 있어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영하 10도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외출할 수 있는 날씨가 됐다.


소문대로...네, 듣던대로 이곳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는 이미 지난 10월 중순 첫눈을 시작으로 한겨울에 진입한 이후로 엄청난 한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저녁 8시반정도에 지던 해가, 요즘은 오후 3시면 지는 탓에 점심 먹고 무엇을 하려고 하면 이미 세상은 깜깜해져 낮밤을 헷갈리게 합니다. 그래서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문화가 발달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아침 8시면 출근(혹은 등교)을 하고 오후 3시반이면 퇴근을 해 가족과 시간을 보냅니다.

가로등도, 건물도 많지 않은 이 동네에 빛반사 스티커나 장신구는 필수입니다. 겨울에는 자전거도 전조등을 달아야 합니다. 순록(길가에 갑자기 잘 뛰어듭니다)의 뿔에도 빛반사 스프레이를 뿌리고, 어른이고 아이고 반짝이는 스티커와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닙니다. 흑야가 있는 이 곳 어둠 속에서 차량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차장마다 설치된 전기 콘센트

지하 주차장이 많지도 않은데, 늘 바깥에 차를 세워놓다보니 엔진이 얼어버리는 일은 허다합니다. 그래서 핀란드 주차장에는 이렇게 전기 콘센트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은 저희집 차도 도저히 이 곳 추위에 견딜 수 없었는지, 뒷 자석 왼편 문이 아무리 잡아 당겨도 열리지 않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우는데도 카시트 옆에 앉지 못하고 조수석에서 아이를 챙겨야만 했습니다. 눈이 거의 매일 내리기 때문에 겨울에는 차량에 스노우타이어를 필수로 장착해야 합니다.

어느새 옷차림도 북극권 날씨에 맞게 적응을 마쳤습니다. 한겨울에 반팔, 반바지로 집안에서 돌아다니던 호사는 이미 저 먼 기억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양말을 신고 자는 것이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이제는 살기 위해 수면바지 안에 내복까지 끼어입고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했습니다.


핀란드 언냐들은 어떻게 멋스럽게 겨울옷을 입는지 열심히 구글링도 하고 쇼핑사이트에도 들어가보고 눈동냥도 해보았습니다. 참 멋지게도 스키복 같이 펑퍼짐한 옷들도 척척 근사하게 레이어드 합니다. 아무리 제 얼굴을 핀란드 겨울 패션에 대입해봐도 답이 안나옵니다. 핀란드 언니들의 백색빛깔 머리가, 작은 머리 크기가, 북방계 미인형 얼굴이 이미 다 한 것 같달까요. 두껍게 입어도 예쁘게 입는 법을 터득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최소 이 북극의 추위에 견딜 정도로 껴 입는 방법은 알 것 같습니다.

오우나스바라 스키장에서 노르딕 스키를 배우는 아이들

특히 아이들의 방한용품에 대해 물으신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존재합니다. 한국에서 소위 우주복이라고 부르는 방수재질의 할라리(Haalari)를 맨 마지막에 꼭 입습니다. 눈과 코만 쏘옥 내놓는 모자와 손장갑, 발장갑도 필수입니다.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옷차림만 있을 뿐이다'라는 격언이 요즘 더욱 자주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핀란드 방식으로 제대로 옷입은 형아와 헐벗은 저희집 아기 비교 사진

이렇게도 추운 얼음의 땅에서 이 나라 사람들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긴 겨울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 모든 것을 개척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핀란드인들의 끈기를 나타내는 말 'sisu'는 겨울을 보내는 이 때에 더욱 피부로 와닿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그 정신력은 우리 한국인들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지난달 19일엔 이곳 로바니에미에 있는 산타클로스 빌리지에 공식 오픈 행사가 열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조용한 마을도 시끄러워집니다. 길고 추운 겨울의 우울한 분위기를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로 이겨내려는 듯 지난달부터 일반 가정집 창가에는 예쁜 LED 조명 장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울한 겨울을 이기려는 듯 집집마다 예쁜 LED 조명을 걸어둔다

이 곳의 겨울 속 흑야를 경험하다 보면 지구가 자전과 공전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은 밝은 태양을 등지고 또 멀어진 것 같아도 그 어둠과 추위의 끝자락으로 깊숙이 걸어가다보면 어느새 따뜻한 여름이 다가온다는 믿음으로 이 시기를 살아가게 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니까요.


오늘 밤은 예전에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 한 구절이 생각이 나네요.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어제 하루도 추운 광장에서 떠시던 분들에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광명을 기다리는 모든 분들에게도 핀란드에서 작은 희망을 건넵니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Light After Darkness)


1. 어두운 후에 빛이오며, 바람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2. 연약한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받고

눈물난 후에 웃음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


3. 괴로운 후에 평안하며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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