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당과 중국집의 도시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아침 4시 50분 용산역으로 향했다. 5시 43분 익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익산역은 KTX가 다니지만 예매 시간을 놓쳐서 무궁화호를 타게 되었다. 이른 시간의 완행열차는 출근하는 바쁜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었다. 출퇴근이 잦은 구간이 지나자 빼곡히 사람을 채웠던 기차 안 좌석들이 듬성듬성 비워져 간다. 앉아있는 틈으로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창밖으로는 논밭이 빠르게 지나쳐가지만 기차 안은 느긋하고 나른한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행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KTX 티켓을 구하지 못해 아연했던 기억이 지워진다. 무궁화호를 타서 '오히려 좋았다.' 군산역과 익산역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지만 군산역으로는 KTX가 다니지 않고 기차도 많지 않으니 서울에서는 익산으로 가는 편이 좀 더 선택의 폭이 넓다. 서울에서 군산으로 빠르게 가려면 익산까지 KTX를 타고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로 환승하는 방법이 있다. 친구가 익산역으로 픽업을 와주어서 익산부터는 차를 타고 편하게 군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우리의 첫 방문지는 매운 고추 짜장이 유명한 <지린성>인데 무려 오전 10시 반에 도착을 했다. 군산은 오래된 유명 중국집들이 많은 곳이다. 10여 년 전에 군산에 왔을 때는 전국 5대 짬뽕이라 꼽힌 복성루가 제일 유명했다. 복성루는 여전히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군산의 다른 중국집들도 많이 소개가 되고 인기가 많아졌다. 지린성도 역시나 몇 차례 TV에 나온 곳인데, 매운 고추 짜장이 유명한 곳이다. 주말에는 사람이 말도 못 하게 많다고 하고 평일에도 재료 소진으로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오전 10시 반에 가는 게 유난은 아니라는 것이 군산 친구의 말. 매장에 들어가니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다. 아침 10시 반부터 중식이라니 조식치고 참으로 푸짐하다. 메뉴는 단출하게 짜장, 짬뽕, 고추 짜장, 고추 짬뽕인데 면과 밥으로 나뉘어 딱 8가지다. 원래는 탕수육이나 다른 요리들을 판매했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많아지고부터는 단일메뉴만 판매한다고 한다. 짜장이 팔천 원, 짬뽕이 만천 원인데 회전율이 빠른 것이 나을 정도라니 사람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짐작이 되었다. 우리는 고추 짜장면과 고추 짬뽕, 그리고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친구가 있어서 일반 짜장을 주문했다. 고추 짜장은 짜장면에 듬성듬성 썰어진 매운 고추가 들어간 것인데, 일반 짜장과 달리 간짜장과 같은 방식으로 나온다. 짜장을 비비니 입맛이 확 도는 매운 냄새가 확 난다. 간짜장의 맛에 고추의 매운맛을 조화롭게 섞어낸 맛이다. 예상대로 맛있다. 군산의 친구 말로는 군산의 중국집을 가면 대부분 실패가 없다고 한다. 오래된 중국집에는 집마다 오래가는 비법과 맛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수긍이 가는 말이다.
지린성에서 식사를 하고 향한 곳은 이성당이다. 짜장면을 먹고 빵집이라니. 평소라면 아직 첫끼도 먹지 않을 시간에 남들은 두 끼에 달하게 먹는다. 이것이 여행 아니겠는가. 군산에 온 것이 5번 정도 되는데 이성당을 빼놓은 적이 없다. 이제는 서울에도 지점이 많지만 군산 본점을 찾는 사람이 많은지 줄이 길다. 본점의 위엄이 느껴진달까. 이성당 서울 지점들은 오픈했을 때를 제외하면 잘 가지 않는 곳이지만 군산에 오면 가고 싶다. 군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성당일 정도로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성당의 대표 메뉴는 단팥빵과 야채빵. 워낙 많은 판매량을 자랑하는 빵들이라 이 것 외에 다른 빵을 살 경우 줄이 더 짧은 곳에서 빨리 구매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한 번씩 먹어보고 싶은 다양한 종류의 빵들이 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줄은 없었지만 매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포장해 갈 빵들을 조금씩 구매하고 매장에서 먹을 아이스크림과 빵을 네 개 구매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매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왔을 때는 여름이라 팥빙수를 먹었는데 팥이 맛있는 집이라 빙수도 훌륭했다. 단팥빵과 야채빵, 고로케과 딸기가 든 소보로빵을 한입씩 나눠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무척 배가 불렀다. 이제는 산책이다.
이성당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하면 <군산시간여행마을>이다. 구획이 잘 나뉘어 있는 정갈하고 야트막한 건물들이 있는 상점가이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고 문을 열지 않은 곳도 많았지만 슬렁슬렁 걸어본다. 벌써 20년도 넘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되었던 <초원 사진관>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군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어린 시절 이 영화를 통화 군산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 영업을 하는 곳은 아니고 영화 배경 관광지로 운영이 되고 있다. 이곳을 스쳐가는 20 대들은 과연 이 영화를 알까, 잠시 궁금증이 스쳐간다. 여행을 가서 인물 사진을 자주 찍지 않는 편이지만 한 번 찍어보았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서 안 찍었는데 요즘에는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리고 안 찍을 때가 많다. 사진만 남는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진이 있으면 기억이 더 많이 남는다는 것은 실감한다. 사진은 물질적 이미지뿐 아니라 기억 속에 그대로 저장되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한다. 문방구처럼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한 가게에서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본드 풍선을 사서 불고 웃어가며 골목 구석구석을 걸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거리는 한껏 늘어진 고양이들의 차지였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와 '마리서사 서점'에 들렀다. 오래된 가옥을 변형한듯한 곳은 시간여행이라는 마을 이름과도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서점 치고는 많다 할 수 없지만 작은 서점 치고는 책이 없지 않은 편이었는데 큐레이팅이 잘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둘러보았다.
산책을 마치고 뒤늦게 도착한 친구를 데리러 군산역으로 갔다. 군산역 바로 옆에는 꼬치데이라는 작은 간식을 파는 집이 있는데, 군산 친구가 '콘소'를 먹어야 한다며 이곳으로 이끌었다. 콘소는 옥수수가 들어간 콘소시지에 전분을 묻혀 튀겨낸 것이다. 튀김옷이 얇으면서도 쫀득하고 골라 먹을 수 있는 여러 소스와 조화가 훌륭했다. 매장에서 병맥주도 판매를 해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는데 너무 좋은 맥주 안주였다. 다음 갈 곳이 은파 호수공원이었는데 가지 말고 여기서 맥주 계속 마시자고 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별생각 없이 따라간 곳에서 의외의 훅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콘소에 맥주를 마시며 마음이 노곤노곤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온 것이 다 이런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구나. 여행의 즐거움이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꼬치데이 군산역점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슬픔)
차를 타고 은파 호수 공원에 도착했다. 군산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4월 초라 벚꽃이 한창 피었을 무렵이었다. 사방이 온통 핑크인 흐드러진 벚꽃길을 쭉 걸었다. '마침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줄곧 기다려온 봄이었다. 맑고 청초한 핑크빛 꽃망울들이 마치 수줍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 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눈과 마음이 호강하는 길이었다. 은파 호수 공원을 반바퀴 정도 둘러보고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관광지에 있는 가게 특유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음식점의 이름은 '물빛마을 해물 왕파전' 외관에 이어 이름에서도 오는 기대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도 곧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기에 시간상 먹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반갑게도 군산 쌀먹걸리가 있길래 바로 주문했다. 지역 막걸리나 전통주를 마시는 것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막걸리가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는데 기본 안주로 주신 두부, 마른 멸치, 고추장, 김치도 맛이 있었다. 오 괜찮은데 하며 먹고 있는데 곧이어 나온 도토리묵의 사이즈가 무척 컸다. 바가지인 집은 아닌가 보다 하고 묵을 하나 집어 먹는데 부드럽고 쫀득하고 말랑하다. 시판용 묵 특유의 단단함이나 푸석함이 없어서 한번 또 감탄했는데, 뒤이어 나온 파전 사이즈도 만만치가 않다. 튀기듯 나온 해물 파전은 다소 바싹 구워져 딱딱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거슬리지 않을 정도였고, 무엇보다 해물의 종류와 양이 많은 편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는 일행들의 말에 군산 친구가 조금 거만하게 말을 보탠다. "여기 전라도예요. 맛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는 모두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맛있었구나.
당일치기로 가도 좋은 군산여행. 브런치북 취지에 걸맞게 먹으려 떠난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잘 먹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날이 시원해진 가을 다시 한번 군산을 찾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