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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 Jul 03. 2019

숨,숨,숨-4월부터 6월까지

4월의 독감


지독한 감기로 올해의 4월을 보냈다. 고열과 기침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밥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 훌훌 털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방 안에서 천장만 바라보기를 여러 날, 몸이 나아지는 듯해서 움직이면 도로 탈이 났다. 겨우겨우 보름 만에 독감을 떼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맞닥뜨렸다. 꽤 오랜 시간 앓은 탓에 체력이 달려 해야 할 일들을 도무지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앉아서 책을 읽는 일도,  친구와 통화를 하는 일도, 우유를 사러 집에서 가까운 마트를 가는 일도 버거웠다. 독감은 떨어졌지만, 그 후에도 후유증으로 조금 더 고생해야 했다.


그렇게 4월을 허무하게 지나고 5월이 되자 아픔 뒤에 숨어있던 속상함이 슬그머니 찾아왔다. 이렇게 아프려고 이번 학기 휴학 신청을 한 건 아닌데, 침대 위에서 내리 한 달을 보내다니. 다이어리에 곱게 적어놓았던 약속들과 알찬 계획은 허물어진 지 오래고 밀린 일을 처리하려니 손을 댈 엄두가 안 났다. 악순환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힘에 부쳐 진도가 안 나가고 의욕은 넘쳐서 약속은 계속 생겼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마음으로 2주 정도를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갑자기 일상 속에서 실수가 잦아졌다. 소지품을 잃어버리고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해 중요한 문서 제출을 못 하고, 엉뚱한 버스를 타고서도 한참 지나서야 알아차리기도 했다. 연달아 이런 실수를 반복하니 기분도 엉망이고 나 자신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소소한 실수들은 슬며시 자책을 불러왔고 자책은 우울을 동반했다. 가뜩이나 집도 수리와 이사 문제로 어수선한 마당에 손 대는 일들도 엉망이니 무작정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대강 급한 불을 끄고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떠나면 기분도 좋아지겠지, 기대감에 부풀어 5월의 제주도로 향했다.


5월의 제주


협재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숙소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바다는 시시각각 푸르고 깊은 색을 선보였다. 성수기가 아니라 관광객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바람도 선선하니 여행에 알맞은 날들이 이어졌다. 한 가지 문제는 근사한 자연 풍광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뭉치가 머리와 마음에 가득 들어차 있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다.


여행 둘째 날 아침 여덟 시, 혼자 바다로 나갔다. 현무암에 앉아 바다를 만끽할 심산이었다. 바다 가까이 가 보니, 바다는 벌써 사람들을 가득 안고 있었다. 주황색 부표를 띄우고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보였다. 휘익- 휘파람 소리와 참았던 숨이 터지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숨이 한순간 터져 나오는 소리는 경이롭고 묘했다. 마치 생명의 첫 탄생처럼 거룩했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위로처럼 나를 스쳐 지나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물끄러미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해녀를 바라봤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대여섯명의 해녀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바다를 오갔다. 급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몸짓.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해녀들의 물질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셔터를 눌러댔다. 해녀들은 나도, 그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해녀의 숨은 날 때부터 정해진다고 한다. 물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느냐에 따라 하군, 중군, 상군으로 나뉘는데 하군, 중군은 아무리 노력해도 상군이 되기 힘들다. 마지막 숨에 다다르기 전에 해녀는 반드시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눈 앞의 욕심을 따르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노장 해녀들은 젊은 해녀들에게 ‘절대 욕심 내지 말고 너의 숨만큼 하라’ 는 조언을 건넨다.


해녀의 휘파람과 숨-숨비소리-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두시간쯤이면 끝날 줄 알았던 물질은 슬쩍 얼굴을 내민 해가 고개를 높이 쳐들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비자림에 갈 채비를 하며 내가 잊고 있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 숨, 내 속도, 내 한계.


그러나 그 생각이 마법처럼 엉킨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나는  얼마간 엉망인 기분을 가까스로 달래가며 여행에 임했다. 오랜만의 여행이 아쉬워 끊임없이 좀 더 보고 좀 더 먹고 무언가를 얻어가려고 애쓰는 내가 있었고, 육지의 버스와는 급이 다른 제주도 버스의 배차 간격을 기다리느라 조급한 내가 있었다.


인스타그램 속 유명한 카페나 가게는 들리지 못했다. 그럴싸한 사진이나 제주도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나 필수 쇼핑 목록도 챙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을 문득 되뇌어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내게 필요한 건 활기찬 관광이 아닌 그저 집을 떠나 누리는 소소한 휴식이었다는 사실을, 참았던 숨을 쉴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는 점을,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번뜩 알아차렸다.

 

6월의 요가


여행을 다녀오니 5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6월이 찾아올 테지, 만나는 사람마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2019년의 반, 그 위에 서서 나는 새해 첫날 내게 한 약속-운동을 하자-을 다시 꺼내 보았다. 미뤄두었던 다짐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 여행 다녀온 뒤 요가원을 찾았다.


3개월 이용권으로 끊으세요, 요가 선생님의 권유에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한꺼번에 끊어 놓고 버린 돈이 꽤 많아서요.”아마 그동안 날려 먹은 운동 이용권을 모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괜찮은 카메라를 하나 살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얇은 지갑 사정으로 1개월, 주 3회 총 12회 분을 등록했다. 장롱에 숨어있던 요가복을 꺼내 깨끗이 빨고 요가 매트 위에 깔 귀여운 비치 타올도 샀다.


5월 29일, 근육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꾸역꾸역 한 시간 강습을 오기로 마쳤다. 몸의 구석구석이 자신의 존재를 열렬히 나타내며 여기가 자기 자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5월의 마지막 날에도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를 이끌고 요가를 갔다. 6월의 첫날도,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12번의 강습 중 7번의 수업을 끝냈다.


요가에 적응해가면서 두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첫째로 수업 중에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숨 쉬세요!”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때마다 내가 화들짝 놀라며 호흡을 재개한다는 사실이다. 운동하면서 당연히 숨을 쉬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실제로는 어렵고 힘든 동작을 할 때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숨을 참고 있었다. 숨 쉬는 일조차 스스로 넉넉히 내어주지 못하는 야박한 면을 발견하고 나는 괜히 겸연스러웠다.         


요가 선생님은 항상 동작을 취할 때마다 되는 만큼만 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별 성과 없이 애만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수강했던 요가 수업들이 모조리 미완으로 남은 게 아닐까.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잘’하려고만 하는 일이 맘처럼 잘 될 리 있었을까.


몇 개의 반성과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요가를 했다.조금 민망했지만 거친 숨소리를 마음껏 내보았다.안 되던 동작을 멋지게 성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훨씬 편안했다. 눈을 감고 몸을 비틀며 제주 바다를 떠올렸다. 귓가에 호이호이- 숨비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옆 사람은 몸을 폴더처럼 접지만 나는 나무 토막마냥 뻣뻣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숨을 쉬고, 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부풀었다.


내가 요가를 통해 배워야 하는 건 겸허함인지도 모른다. 결심과 의욕만으론 할 수 없다. 인내를 가지고 단계를 밟아야 한다. 주변을 쫓느라 무리해서도 안 된다. 시간을 쌓아가는 길, 멀리 오래 돌아가는 길, 그것이 요가에선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책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4월의 고된 독감, 5월의 심심한 여행과 6월의 요가가 내게 머뭇머뭇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줬다. 나는 미욱하고 부족한 인간이라 이 얕은 깨달음을 금세 까먹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 요가를 할 때만큼은 마음껏 숨을 쉬고 제주의 숨비소리를 떠올려야지.


욕심내지 않고 내 속도를 정립해 나가야지, 내 한계를 직시하고 천천히 넓혀 가야지, 지치면 무리하지 않고 다독여야지, 여행을 떠나 또 작은 선물 같은 추억을 안고 와야지,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야지, 나중 말고 지금, 여기를 살아야지. 다시 끝없는 다짐이 이어진다.


그만-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한 번 더 천천히 그리고 깊게.


2019년 6월1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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