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좁은 골목길에서 하나둘씩 떠나는 친척들을 바라본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옆에는 크고 낡은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여름의 열기에 엄마의 목에는 땀이 엷게 배어 있다. 배웅하는 손들 뒤로 오래되고 커다란 청록색 양옥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에 무심코 이 기억을 이야기해주자 엄마는 놀라워했다. 고작 두 살 무렵이었는데 기억하는 게 신기하다며 이것저것 물어오셨다. 공간, 시간, 계절과 색감까지 또렷한 이 기억은 내게 한 장의 사진처럼 깊숙이 각인되어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신을 믿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이고 이 모든 시간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시작과 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인생을 하나의 여정이라고 보기에는 영 엉뚱한 면이 있었다. 여행자가 되겠다고 자원한 기억은 없는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이 내 앞에 놓여있다. 출발할 때 내가 선택한 건 아무것도 없고 도착지가 어디인지도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다.
얼결에 세상을 살 게 된 나는 내 존재를 오랫동안 의심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종종 신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굳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물론 답은 듣지 못했다.
김초엽의 단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공생 가설’을 읽으며 어쩌면 나와 공생했을 수도 있는 아주 이질적인 존재를 상상해봤다.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 나를 이따금 괴롭히는 이 공허함이, 정말 나를 구성하던 일부가 사라져서라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나의 일부가 훌쩍 떠나버린다면 그리워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것이다. 일종의 환상통 같은 게 아닐까. 없는 데도 있다고 느끼는 감각.
공생 가설 속 류드밀라 마르코프는 유년기 이후에도 인간과 공생하는 ‘그들’과 이별하지 않고 자신의 시초지를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사람들은 류드밀라가 그려낸 분명하고 정교한 외계 행성에 열광한다.
류드밀라가 세상을 떠나고, 뇌를 판독하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수빈은 우연히 아기들의 울음소리에서 ‘복잡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데이터를 잡아낸다. 류드밀라 행성의 실존이 밝혀진 날, 아기들은 하나같이 류드밀라를 떠올리며 ‘우리가 시작된 곳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연구 끝에 수빈은 인류는 유년기 이전까지 어떤 이질적인 존재와 공생하며, 그들이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자라게 만든 뒤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수빈이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느낀 적 없는 무언가가 아주 그리워지는 감정을 느끼며 끝난다.
소설을 읽으며 외계에서 온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이들이 내게 기쁨과 배려를 가르치고, 슬픔과 그리움, 분노와 거북함, 친절과 자상함을 심어줬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진 것들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내게 사랑을 가르쳐줬을까. 나를 떠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일러주고, 어쩌면 섭섭한 마음에 혼자서는 지나치게 완벽하고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내 마음의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떠난 걸까. 그들을 영영 잊지 못하도록. 비어있는 한 조각 덕분에 인류는 사랑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잊기 위해 류드밀라의 행성에서 떠나온 또 다른 이를 보듬고 아끼며 살아가나 보다.
과학적으로 보통 서너 살 이전의 기억은 유년기가 지나면서 사라진다고 한다. 내가 가진 이 최초의 기억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이 내게 남기고 간 작고 선명한 흔적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마치 작별 인사처럼, 먼 미래의 재회을 약속하는 하나의 증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