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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훈 Jul 22. 2020

[수플레] 견뎌내거나 파멸하거나

ep. 23 김사월 - 세상에게

 

 안녕하세요. 수플레 영훈입니다. 저번 주 금요일에는 수플레 보니, 종훈, 쥬디님과 퇴근 후에 만나 도토리 전집에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여름밤을 보냈어요. 


수플레 사람들 ( 그림 by 보니님 )


그 날의 예쁜 시간을 자기 전에 곱씹어 보니 결국 우리 모두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넷 모두가 국제회의업, 의료업, 여행업, 서비스업 등등 각자의 분야에서 부딪히고 배우고 또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걸 알았죠. 이십 대 초반에는 이십 대 후반이 되면 방황을 끝내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은 방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라는 것 정도를 어렴풋이 아는 어른이가 되어있네요. 이런 생각이 드는 날에 제가 듣는 노래가 있어요. 바로 '김사월의 세상에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Vg6MuOzfVI


있잖아, 여기서 일 년 전 이때쯤에  
우린 세계 일주에 대해 말했고  
캣파워를 듣고 있었지

지금은 그때도 우리도 남지 않고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발자국만이  
세차게 울리고 있어 

이제야 깨달았지  
세상에게 난 견뎌내거나 파멸하거나 할 수밖에 
불확실한 나에게  
이미 정해진 것은 방황 하나뿐이라는 걸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희망만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나는 워낙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아니 그것보다는 긍정적이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화한 사람이었기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로부터 공익광고로부터 교과서로부터 배우는 것은 온통 희망이었지 절망은 마치 금기된 행동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좋은 것만 말하고 가르치던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고 절망에 빠지는 것 같았고, 뉴스에는 매일 누군가가 다치고 죽는 기사가 넘쳐났으며, 교과서 밖의 세상은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에는 더 이상 동력이 없어 엔딩이 필요했으나 삶은 눈치 없이 계속 이어졌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으나 엔딩을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 놓이기도 했다.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고백하던 어느 날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몸과 마음이 고장 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기후위기를 비롯하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혐오가 싫어 무기력해지는 나날도 많았다.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내 몸에 쌓이다 보니 어느덧 나는 '희망만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라는 말의 의미를 천이 찬찬히 물을 머금듯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는 것이고,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것이며, 욕심이 없으면 불행도 없는 것이었다. 나만 이런 흐름을 겪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의 서재에는 <신경 끄기의 기술, 희망 버리기 기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책들이 들락날락했고,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날 말이라는 이야기가 세상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어느덧 물과 나무를 동경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떤 풍파 속에서도 그저 흘러가고, 제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사는 자연의 태도가 절망에 가까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절망이 사치라 말하는 자의 라디오를 들었다. 그는 분노를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 같았다. 호기심과 사랑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나에게 그는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새로운 희망이고 기대고 욕심이었다. 그는 책임감(responsibility)을 respond + ability. 즉 반응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더 이상 그 예전의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 직면하는 용기. 

그는 또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풀에 지쳐서 너를 피해버리지. 문제란 건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물에 젖어 흐물해졌던 천이 순식간에 빳빳한 천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간 혼동하고 있었다.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뀔 거야. 어차피 노력해도 세상은 결국 망할 거야. 어차피 뛰어봤자 벼룩일 거야. 그런 생각들이 나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을 때 그의 움직임은 내게 커다란 나침반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기. 언제나 그랬듯 내 안에서 또 다른 길을 찾기. 길이 보이지 않을 땐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기. 무너지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스스로를 잘 돌보며 정비하기. 새로운 것을 보고 알게 되었을 땐 다시 직면하기. 그것들이 나를 관통한 뒤에는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표현하기. 표현함으로써 세상과 더 연결되기. 그렇게 점점 커지기. 나무가 되고 물이 되기. 세상이 되기.


밤의 버드나무


물과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흘러가듯 살고, 제자리에서 순응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굳건하고 강인한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장 수동적인 모습으로 가장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더더욱 나무나 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졌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는 것은 주어진 하루가 그 어떤 것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기와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로 내가 사과나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사월의 세상에게도 그렇다. 내게는 산과 바다처럼 묘한 위로와 힘을 동시에 건네주는 노래다. 절망이 사치라 말하는 사람처럼 또 한 번의 나침반을 만난 느낌이다. 그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쉽게 말하지 않는다. 크나큰 기교 없이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툭툭 노랫말에 얹는다. 사랑의 밝은 면보다 지독한 면을 더 응시하고, 세상의 아름다운 면보다 비극적인 장면들을 솔직하게 늘어놓는다. 그래서 위로가 된다. 그의 노래가 사람이 되는 형상을 떠올리면 '힘내!'라고 말하며 어깨가 처진 나를 꼬옥 안아주는 형태이 아니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꿉꿉한 도시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두 발은 크지 않지만 꼿꼿하게 앞을 향해 땅을 디디고 있다. 세상에게라고 말하고 있지만 스스로에게도 말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는 노래 속에서 오늘도 방황하고 내일도 방황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의 노래에는 세상이 있다. 밝음에는 어둠이 있고, 설렘에는 권태로움이 있고, 사랑에는 이별이 있고, 삶에는 죽음이 있는 세상.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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