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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훈 Sep 23. 2020

[수플레] 사랑을 태도로 전진!

ep31. 혁오-Silverhair Express (장기하 Remix)

 몽상. 모순. 소설. 음악. 우주. 사랑. 내가 좋아하고 오래 머무는 단어들이다. 그런 내 마음을 확 잡아끄는 노래가 최근 발매되었다. 올해 초 나왔던 혁오의 '사랑으로' 앨범 곡들을 리믹스한 첫 번째 곡.  혁오 - Silverhair Express (장기하 Remix).



혁오의 <사랑으로> 앨범이 나오던 날, 하루를 끝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앨범 전곡을 차분히 듣던 과거가 생생하다. 모든 소리의 종착지가 사랑으로 귀결되는 밴드 사운드를 들으며 이런 앨범을 들을 수 있다니 참으로 괜찮은 하루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앨범 중에서도 특히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이끄는 듯한 노래가 있었는데 바로 3번 트랙 Silverhair Express. 이 곡의 가사는 3분이 넘도록 이게 다다.


https://www.youtube.com/watch?v=Boj4g7IuTjo

[LIVE] 혁오 (HYUKOH) _ Silverhair Express @ HYUKOH 2020 WORLD TOUR [through love] - SEOUL


'알아가거나 잊어가거나

사랑하거나 슬퍼하거나

잊어가거나 잊혀가거나

사랑해야지 슬퍼하지 마'


가사가 많지 않은 노래는 때때로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노래는 쿵쿵 거리는 드럼 소리가 기차가 전진하는 소리처럼 들리고,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차곡차곡 섬세하게 쌓으며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여행 중인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여기에 오혁의 허밍 같은 노랫말이 더해지는데 마치 할 말이 너무 많아 할 말을 잃고 공명만 남아 시공간 어딘가를 표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노래가 끝나고 소리의 잔상이 떠다닐 쯤에는 방구석에 누워 온 우주를 헤집는 꼬마가 눈에 밟힌다. 복잡한 세상에 지치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을 읊조리는 선율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부끄럽게 피어오른다.


마음에 묻어뒀던 그 곡이 며칠 전 장기하 리믹스 버전으로 새롭게 발매되었다. 혁오와 장기하의 콜라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동공이 확장된 나였지만, 거기에 더 가슴 벅찬 소식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이 리믹스 버전의 가사가 내가 좋아하는 김초엽 작가의 글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올해 가장 인상에 남은 소설책이 바로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었는데 그 소설책의 그 단편이 이렇게 좋아하는 뮤지션들과의 협업으로 새롭게 탄생되었다니... 이 자체가 너무나도 우주적이고 사랑스러웠다.


그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qlZ43rzLvDo

[Official Audio] HYUKOH(혁오), Chang Kiha(장기하) - Silverhair Express (장기하 Remix)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계속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각자의 상상력으로 노래와 가사를 감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럼에도 수플레니까. 곡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가사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할머니인 안나의 대사다. 소설 속 안나는 딥프리징이라는 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는데 이 기술은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에 다른 행성계로 이동할 긴 시간 동안 인간이 동면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혁신적인 기술로 주목받았었다. 하지만 이후 웜홀 통로가 발견되며 빠른 시간 내에 다양한 행성들을 이동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슬렌포리아라는 행성으로 이주하는 것은 경제성이 떨어져 연방 정부가 슬렌포리아로 가는 교통편을 끊어버린다. 딥프리징 기술을 완벽하게 구현한 뒤 슬렌포리아로 먼저 이주한 남편과 아이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던 안나는 결국 가족으로부터 고립되고, 언젠가 다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날을 고대하며 100년 넘게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는 삶을 산다. 그런 안나가 머무는 정거장을 폐기시켜야 하는 임무를 가진 한 남성이 안나를 만나 설득을 하고 그 과정에서 안나가 하는 말이 바로 이 노래의 가사인 것이다.


소설 속 상상력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만났을 때, 이야기는 질문을 던진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이 우리를 정말 더 가깝게 만들어주었나. 물리적 거리를 단축시킨 만큼 심리적 거리감이 더해지는 것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만남과 소통이 쉽고 활발한 시대에서 우리는 정말로 소통다운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발전이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일까. 기술의 발전이 만약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라면 오늘은 사랑하기 가장 좋은 날이지 않을까. 와 같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에 남았다.


노래가 서로의 시선을 거쳐 다른 노래로 재탄생하고, 소설이 노래가 되는 웅장한 일들이 건강한 방향으로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희망해보며 오늘도 감각하고 표현해낸다. 희망. 감각. 표현. 외로움의 총합. 모두 사랑의 또 다른 이름들이기를 바라며.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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