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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Apr 03. 2024

가을이의 가지치기

"자~ 오늘은 김똘똘 놀이를 해볼까요?"

놀이라는 내 말에 아이들의 눈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반짝인다.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른다며 볼멘소리가 저 뒤쪽에서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아주 재미있는, 너무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어 설명한다. 


"한 명씩 차례로 일어나서 '김똘똘입니다.'하고 일어섰다가 앉는 거예요."

아이들이 '에이 별 것 아니네' '그게 무슨 놀이예요'라고 실망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설명 후 바로 한 호흡으로 내가 '김똘똘입니다'를 군인이 보고할 때처럼 

과장해서 흉내 내니 아이들은 까르르 웃는다. 

규칙은 허리를 바로 펴고 서야 하고, 지난 시간  '네'했던 자기 목소리보다 조금 더 커야 한다. 


웃음이 잦아지고, 교사 책상 바로 앞에 앉은 지후를 보고 출발 신호를 준다. 

"황지후입니다."

"조나래입니다."

"이시윤입니다."

"강민서입니다."

...

아이들의 목소리가 리듬감 있게 교실을 채운다. 

크게, 혹은 작게 내는 소리는 아이들의 최선임을 알기에 나는 하나 하나와 눈을 맞추고, 

손가락과 표정을 사용해서 소리 없는 칭찬을 이어간다. 


가을이 차례다. 

가을이는 입을 앙 다물고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도리도리 한다. 

자신은 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세 번째다.  

가을이는 지지난 주와 지난주에도 발표를 거부했다. 

그때 나는 가을이에게 다가가 왜 그런지를 묻고 

별 대답이 없는 가을이에게 다음엔 꼭 해보자고 하며 넘어갔다. 

오늘도 넘어가야 할까? 아니, 오늘은 미룰 수 없다. 


나는 한숨을 들이켠 후, 엄하게 표정을 짓고 잠시 바라본다.

이어  "남가을, 일어서세요." 큰 소리 한다. 

달라진 내 반응에 놀랐는지 눈이 더 커진 가을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거세게 도리도리 한다. 


나는 다시 더 큰 소리로 "남가을, 일어서세요."를 반복한다. 

이쯤 되면 좀 전까지 김똘똘 놀이로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간데없고, 

교실은 찬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가을이는 고집스레 다문 입에 더 힘을 주며, 더 짙어진 눈빛으로 나를 본다.


잠시 가을이의 눈 빛을 받아내던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어쩔 수 없구나. 가지를 쳐야겠구나. 가을아, 아프겠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란다. 

나는 엄격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교실 뒷 문쪽에 앉은 가을이의 책상으로 다가간다.  

가을이의 작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수의 타인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직업적으로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혹은 대중강연자들은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처음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불안하고, 떨렸을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는 '발표'라는 행위를 학생들에게 집중해서 훈련시킨다. 

특히 1학년 교실에서는 꽤 공을 들여서 발표 훈련을 한다. 

좀 전에 내가 한 '김똘똘 놀이'라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놀이도 사실은 발표 훈련이다. 


당연히 처음에 아이들은 많은 친구들 앞에서 일어서는 것도 부담스러워하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간다. 

그러나 놀이에는 실패가 없다. 그냥 즐겁게 다시 하는 것이 놀이다. 

놀이라는 형식을 빌려 발표의 내용을 쉽게 하고, 발표의 방법을 느슨하게 해서 반복하면 

어려운 발표도 몸에 익는다. 

어느샌가 예삿일이 된다. 

어려운 일을 예삿일로 만드는 것,  

그 점을 노려는 거다. 


그러나 가끔 가을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한 발 내딛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있다. 

대부분 조심성이 많거나, 내성적이거나, 완벽주의 성향의 아이들이다. 

한 마디로 불안을 쉽게 느끼는 아이들이다. 

그럴 때는 한, 두 번 정도 그냥 넘어간다. 

다른 친구들이 쉽게 하는 것을 보면 안심이 된다.  

다음에는 자기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기고,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언제 주저했냐 싶게 훌쩍 뛰어넘는다. 


가을이에겐 이미 2번을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울타리에서 웅크리고 한 발도 내딛지 않으려 하면, 

그때는 상황적 압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모든 친구들이 조용히 자신을 주시하고, 선생님은 자신을 향해 엄격하고 단호하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  


대부분 아이들은 상황에 못 이겨 마지못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한 번 해 본다. 

그때 나는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하면 돼요. 잘했어. 별 거 아니지?'라고

 좀 전의 살벌한 분위기를 도끼로 확 깨듯이 함빡 웃으며 큰 소리로 칭찬을 퍼붓는다. 

어쩌다 보니 발표를 하게 된 아이는 좀 얼떨떨하지만 기분 좋은 상태로 멋쩍게 웃는다.  

그럼 된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처럼 버티는 아이들도 간혹 있다. 

그때는 인간이 가진 욕구 중 사회적 욕구를 자극해 상황적 압력을 높인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일이다. 

가을이 바로 옆, 아니 바로 위에서 낮고 단호한 소리가 낮게 울리도록 말했다. 

'남, 가, 을, 일어서세요. 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더 이상 교실에서 함께 공부할 수 없습니다."


순간, 움찔하던 가을이는 입을 삐쭉거리더니 '으앙~'아기처럼 울어버렸다. 

통곡하는 소리가 점 점 더 커지더니 교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통곡소리는 잦아들 줄 몰랐다. 

몇 번의 안내에도 목이 쉬어라 울어대는 가을이를 지긋이 지켜보다 

결국, 담임교사에게 연락해 교실에서 데리고 나가도록 부탁했다. 


작지만  다부진 어깨가 흐느낌에 들썩이는 뒷모습을 보며, 

올해의 강적이네, 계속 가지를 쳐 줘야 될 수도 있겠네  생각했다. 

다시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그전까지 꽝꽝 얼었던 분위기를 녹였다. 

그제야 숨죽이던 아이들이 작게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나는 1학년 교사 연구실에 담임교사와 함께 있던 가을이를 만났다. 

풀이 폭 죽은 모습이 측은했다. 

가을이는 김똘똘 놀이를 할 때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앞으로는 부끄러워도 해보겠다고 말했다. 

아마 담임교사가 단단히 지도를 한 것 같았다. 

나는 그 마음에 공감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여기는 학교라서 집에서 처럼 어리광 부릴 수 없다고 다정하게 설명했다. 

이미 한 풀 꺾인 가을이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한 고비를 넘긴 가을이는 개운해진 얼굴로 교실로 돌아갔다. 

나는 담임교사와 가을이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내가 쓰는 사무실로 돌아오니 기운이 없었다. 

겉으로는 흔들림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이렇게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무슨 중국의 정통 예술 '변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꿔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가끔은 버겁고 힘들어서 아이에게 삐져나온 가지가 보여도 못 본척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교사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 조금 아플지라도, 가지치기를 해서 아직 유연한 나무의 방향을 잘 잡아줘야 한다. 

그것을 그냥 두면 덧자라 결국 그 나무가 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거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이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 스스로 하게 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중 교육적인 방법은 가을이의 마음에 공감하되,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다음 시간 가을이는 내가 들어가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 역시 긴장되었다. 

수업하기 전 나는 가을이에게 다가가 오늘도 김똘똘 놀이를 할 것이라고, 

지난번 약속한 것 기억하냐고 부드럽게 물었다. 

가을이는 예의 그 입술을 앙 다물고 '네'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어려운 발표를 예삿일로 만드는 김똘똘 놀이가 진행되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가을이는 반쯤 일어섰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 남가을입니다."하고 웅얼거린 후 앉았다.


그 순간 

"와~~~ 선생님  남가을이 했어요.", 

"남가을 잘했어!" 

내가 칭찬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봇물 터지듯 소리쳤다. 


'아, 이 녀석들... 다들 신경 쓰고 있었구나. '

교육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서로서로를 교육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확 밀려와 괜히 울컥했다. 


나는 가을이는 물론, 친구가 잘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준 1학년 1반 친구들 모두를 칭찬하며 

한바탕 다 같이 웃었다. 

그동안 버겁고 힘들었던 모든 마음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을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웃음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앙 다문 입술은 여전했지만, 입꼬리는 살며시 말려올라가 있었다. 

나는 촉촉해진 눈으로 가을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을아, 아팠지? 그래도 해내니 기분 좋지 않니?

그래 그거야. 더 멋진 가을이를 만나는 것

그게 우리가 학교에서 만나는 이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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