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토 Jul 15. 2016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가 되기까지

소시민적 아프리카 ep.02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소요했다. 그래도 여유 있었다. 아직도 날이 이렇게나 밝은걸.

 그래도 최종 목적지인 희망봉은 남아공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세계지리 시간에나 들어본 '희망봉'은 원래는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이름은 희망봉을 가장 먼저 발견한-물론 이 관점은 상당히 서방세력에 치우쳐있다-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가 지은 것이다. 바다가 험해 멀리서 바라볼 뿐, 근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그 후 당시 포르투갈의 왕인 주앙 2세가 명명한 것으로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뱃사람들의 두려움을 살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폭풍이 몰아쳐 지나갈 수 없는 곳'에서 '여기까지만 오면 희망이 보인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꾼 덕일까, 디아스에 비해 일반적으로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끝끝내 이곳을 지나 인도 대륙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두산백과 참조)


 아무래도 좋다. 그걸 보기 위해선 꽤 많은 거리를 달려야 한다. 우리, 아니, 김남편은 열심히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나비효과




 워낙에 차 없이 지내온 사람들이라 막상 드라이브를 하니 신이 났다. 차가 있으면 좋긴 좋겠구나. 그러나 우리는 친환경적인 세계시민이므로 매연을 배출하지 않기 위해 차를 사지 않는다. 물론 거짓말이다.

 아무튼 흥 많은 민족의 후예로서-주로 내가-내키는 대로 아무 노래나 흥얼거리고 춤까지 추는 동안 차는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통행료를 내야 했다. 음, 그런데 지갑이 어디 있지?


바다와 맞닿은 곶이 바로 희망봉이다. 거리가 멀었다.


 - 오빠, 오빠가 돈 챙겼어?

 - 어? 내가 챙겨야 돼?

 - 엥? 원래 복대 속에 넣어서 차고 있기로 하지 않았어?

 - 어...? 어?


 돈이 없었다. 한 푼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톨게이트를 통과할 수 없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이 더듬더듬 과거를 되짚어 나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비행으로 지친 몸을 씻었다. 캐리어를 아무렇게나 열어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산뜻한 기분으로 나섰다. 돈이 든 봉투는 두고서.


 짜증스럽게 한숨을 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아했던 뻥 뚫린 길은, 이제 망망대해도 아닌 망망대로처럼 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별수 없으니 차를 돌리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체크카드가 든 지갑은 가지고 있었다. 김남편은 근처의 ATM에서 돈을 찾아 요금소를 통과하겠다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바다를 옆에 끼고 산을 두르듯 난 도로는 가도 가도 끝날 줄을 몰랐고, ATM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갑작스레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운전에 서툴러 시간을 허비했고, 기분이 좋아 해변에서 시간을 여유로이 보냈다. 좀 더 결정적으로는 누가 돈을 챙길 것인지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이 모여 작금의 사태를 탄생시켰다.





첫날밤보다는 첫 부부싸움





 한 번 어두워진 하늘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차 안에서 왜 돈을 안 챙겼는지에 대해 계속 추궁했다. 일정이 꼬이게 되지 않았냐고, 이렇게 어두운데 운전해서 저 먼 곳까지 갈 수나 있겠느냐고.


 그리고 김남편이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는 김남편은 처음 보았다. 이 년 정도 연애를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 제각기 소리를 높였다.


 아, 이제 결혼했다 이거지? 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미끼를 안 준다던가 뭐라던가 그거지? 변.했.어.


아, 찍지마!


 언젠가 드라마에서 들어본 것도 같은 "차 세워, 차 세우라고!"를 외쳤다.


 의연한 척, 이 여행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척, 김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바다를 내다봤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섭섭함 40%, 어이없음 30%, 놀람 25%에 마지막으로 살짝 끼얹은 '너무 많이 화냈나'하는 걱정 5%.


  폐백 마지막 즈음에 대추를 동시에 물라고 했다. 씨를 가져가는 쪽이 주도권을 잡는단다. 나는 기를 쓰고 대추를 물었고 결국 씨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김남편이 말하기를, 내가 하도 열심히여서 그냥 내어준 거라고 했다.


 말하자면 이건 우리 결혼생활의 예고편 같은 거였다. 내가 바득바득 자존심을 세우고, 김남편은 넓은 아량으로 져주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남편이 다가와 나를 달래주고서야 상황은 끝났다. 어둠이 생각보다 빨리 내려 희망봉까지 가기에는 힘이 드니, 펭귄이 산다는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가보기로 했다.


 지켜보는 사람은 없지만 창피했다. 계속된 비행과 시차로 인해 아직 첫날밤은 오지도 않았는데, 그것보다 부부싸움을 먼저 하게 되다니.





시한부 여행자




부부싸움을 한 이 순간조차도 케이프타운은 아름다웠다.


 김남편과 내가 그렇게 화가 났던 이유는 결국 우리가 시한부 여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요즘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휴가 며칠에 상사와 동료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귀하게 얻은 휴가인 만큼 한 톨의 시간조차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때때로 무리한 일정을 계획하게 만든다.


 사정은 신혼여행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닌 아프리카다. 다시 오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촘촘히 짜낸 계획이라는 그물망이 우연이라는 못에 걸려 그 구멍 난 틈새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내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난다. 내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입맛이 썼다. 내가 얼마나 미성숙한 인간인지에 대한 고찰을 채 끝내지 못했을 때 저 멀리 펭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볼더스 비치가 지척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케이프타운에서의 사소한 문제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