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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못정함 May 05. 2024

평화가 준 선물,  간직할 시간   

강원 평창 '라베르나 기도의 집' 피정 후기

전편/ 짧은 휴가, 피정 다짐 후속. 5월 3∼4일 이틀 동안 강원 평창 '라베르나 기도의 집'으로 피정을 다녀왔다. 잊지 못할 첫 피정이었다. 그간의 휴가는 음주가무가 전부였다. 이번은 '어? 어? 어? 어!' 하다 나도 모르게 피장을 떠났다. 본의 아니게 오글거리는 옛 싸이월드 갬성 글이 나올 듯한데, 부끄러움이나마나 내가 나중에 다시 읽으려는 목적의 후기를 남기기로 했다. 



    

피정 첫날 도착해야 할 시간은 오후 3시까지였다. 오전 10시쯤 피정의 집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곳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춥습니다. 따뜻한 옷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오후에 뵙겠습니다 _라베르나 기도의 집". 


가톨릭 신자라면 으레 다녀오는 피정이 뭐겠냐만, 처음인 나로선 '이제 가는구나' 새삼 실감 났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운전해서 약 2시간. 난 좀 일찍 출발했다. 오전 11시에 시동을 켰다. 가다 휴게소에서 점심 먹고, 차에서 유튜브 등으로 시간을 때울 심산이었다. 날씨가 워낙 좋았기에 뭘 해도 마냥 즐거울 것 같았다.

 

경기 이천시 덕평휴게소.


출발 불과 약 30분 만에 이천 '덕평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굉장히 오랜만에 온 곳이반가웠다. 약 14∼15년 전, 수십 번 들렀던 곳이었다. 그 시절 용인의 한 청소년수련원에서 숙식·알바를 하며 가끔 '레크리에이션 보조'로도 투입되곤 했는데, 레크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때마다 찾았더랬다. 당시 실장님(레크리에이션 강사)은 늘 "덕평휴게소는 돈가스가 최고"라며, 본인은 물론 내게도 돈가스를 먹였다.


이번에도 돈가스를 먹어볼까. 설렘을 안고 휴게소 식당에 들어갔다. 워낙 큰 휴게소라 메뉴가 다양했다.


쭉 훑어보니 돈가스 말고도 맛난 게 매우 많았다. 이로써 10여 년 만에 깨달았다. "덕평휴게소는 돈가스가 가장 싸고 양이 많다"는 사실을. 그땐 참 순진했다.


하기야 당시엔 걸핏하면 임금을 제때 못 받아 휴대폰 요금도 체납한 적이 잦았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달은 20대 초였다.


돈가스 대신 '돈가스 카레'를 먹었다.


암튼 그래서 이날은 돈가스 대신 '돈가스 카레-약간 매운맛'을 먹었다.


다행히 간은 잘 맞았는데, 감자와 당근이 보이질 않아 잠깐 상심에 빠지는 해프닝이 불거졌다.


물론 이건 즉석카레가 아니다. 바깥서 사 먹으면 원래 이렇다. 하지만 옆테이블 아저씨들이 "감자와 당근 어디 갔냐"라고 투덜대기 시작하자 내 마음도 덩달아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주변의 환경적 요인 이토록 중요하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제 나는 임금 떼여서 휴대폰 요금도 못 내는 처지를 벗어났도다… 상기했다. 스스로 '난 이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라 자아에 최면을 걸었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다. 역시 사람의 상태는 저마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 진입로.
라베르나 기도의 집 전경.


기도의 집에 정확히 오후 3시에 딱 맞춰 도착했다. 산속에 매우 좁게 난 길을 간신히 따라 오르다, 갑자기 '탁!' 트이며 '크!' 하게 되는 공간을 마주하면 이곳이다.


고요했다. 정말 고요했다. 재잘재잘 새들과 졸졸 물소리가 전부였다.


몹시 상냥하고 인자하신 수녀님께서 마중을 나와주셨다. 직접 기도의 집을 소개하고 방을 안내해 주셨다.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 이날 이곳을 찾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곳의 아름다움과 평화가 모두 내 차지였다.


여기서 달리 할 건 없었다. 다음 날 오전 7시 미사 참례와 오전 8시, 점심 12시, 저녁 6시 식사만 하면 됐다.


 배정 직후 저녁식사까지 남은 3시간 동안 뭐부터 해볼.


고민 없이 일단 낮잠 1시간을 푹 잤다. 깬 뒤, 평소라 휴대폰부터 켰을 텐데 이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챙겨 온 신앙 관련 책을 읽기로 했다.

            


'나를 닮은 너에게'라는, 몇 년 전 미리내성지에서 산 책이었다. 구입 직후 한 차례 완독은 했는데, 어쩐지 한 번 더 읽고픈 마음에 미리 챙겨 왔다.


(내용 중)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마음의 평화를 잃을 정도로 너무 오래 끌지 마라. 그런다고 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때로 나는 네가 너의 길을 너무 분명하게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선택해야 한다.
(내용 중) 네가 하는 일상적인 일을 사랑으로 하여라. 나는 네가 한 일보다는 그 일을 할 때 네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더 많이 본다. 이기심을 버린 채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이나 너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너그러워라. 인내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명랑하여라. 미소 짓는 얼굴과 밝은 마음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여라.


거의 못 지켜온 내용들이다. 이 밖에도 정곡을 찌르는 구절이 많았다. '이제 바뀌어야지,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지' 함께 챙겨 온 메모장에 한 줄씩 써내려 갔다.  


오후 6시 땡 하자, 1층에서 예쁜 종소리가 들렸다. 식사 신호였다. 내려가보니 수녀님들께서 직접 만드신 음식들이 식탁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에서 식사.


난 이 식사가 무척 기뻤다. 맛이야 당연히 좋고, 뭐랄까 따뜻하고 친절한 음식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남김없이 먹었다. 그러고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거의 맨날 밥을 사 먹게 되고, 심지어 술까지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인 터였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식사를 끝내고 산책에 나섰다. 십자가의 길을 돌고, 곳곳을 돌고 또 돌았다. 피정에 오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이땐 이상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화로운 마음이었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에서 내려다본 풍경.


저녁 8시쯤, 해가 떨어지니 고요함마저 잠에 든 듯 더욱 조용해졌다. 새들도 자는 건지 기도를 하는 건지,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로 조용하면 신기하게도 내 머릿속 생각이나 마음들이 음성처럼 들린다.


방에서 혼자 또 책을 읽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특별한 기도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손을 모았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런 마음부터 시작됐다.


내가 여기 왜 왔지…


사실 애초에 불안이나 고민 같은 불편한 마음 자체가 없었다. 나는 당장 만족스런 상태였다.


그럼에도 피정에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런 건 있었다. 실은 최근 내겐 좋은 일들이 많았다. 몇 가지 행운이 따랐을 땐 크게 기뻤는데, 이런 일들이 몇 번 더 반복되자 '왜 계속 좋은 일들이 생기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이게 '설쳐선 안 되겠어' 생각으로 이어지더니, 문득 홀로 시간을 보내며 심신을 재정비해보잔 결심이 생겼다.


그런이날 밤, 막상 기도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들은 썩 좋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예컨대 '신께서 나를 바라보면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셨을까' 싶은 게 있었다. 요 근래 성당은 억지처럼 다녔고 가끔 기도할 때면, '이런저런 게 지금 문제니, 요것 좀 해달라' 식이 많았다.


난 이게 아직도 나쁜 기도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물며 인간도 주변에서 앓는 소리만 해대면 듣는 입장은 지치기 마련이거늘, 신이라도 이 부분만큼은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난 이곳에 감사함 일부를 탕감하려 온 게 아닐는지 싶었다.


※※※ 음,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피정에서의 기도나 단상들은 별도로 다루는 게 낫겠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 방에서.
이튿날 아침.


이튿날, 아침 7시 미사에 참례했다. 수녀님 약 7∼8분과 나만 참여한 미사. 수녀님들의 성가가 아름다웠다. 미사 내내 '감사합니다' 진심을 봉헌했다.


허나 입에선 정작 하품이 나왔다.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민망했다. 그동안 늦게 잠에 들어 간신히 기상하거나, 숙취 상태로 일어난 게 습관이 됐는지 몸의 반응이 어쩔 수 없었던 듯싶다.


미사 후 아침식사는 거르고 싶었다. 아침 자체를 평소 먹지 않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수녀님들께서 왠지 미리 차려두셨을 것만 같았다. 고로 군말 없이 먹기로 했다.


식당에 가보니 토스트, 바나나, 요거트,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난 대단히 즐거웠다. 사실 아침식사도 전날 저녁만큼 나올까 봐 걱정했던 건데, 간단한 과일과 빵과 커피가 꼭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식당에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도 흘렀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넓고 푸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편에선 수녀님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다. 전날 저녁식사 때도 그러시더니, 아침에도 종일 까르르 웃으셨다.


무슨 얘기가 저토록 재밌으실까, 잠깐 직업병이 도져 '엿들어 봐야지' 귀를 기울여봤다. 자세한 내용은 결국 못 들었지만, "바나나와 원숭이가 어떻고 저떻고"… 너무나도 소소한 얘기였다. 내게도 갑자기 미소가 지어졌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 전경.


아침식사 후 또 산책을 했다. 이번처럼 특별한 프로그램은 없는 피정이라면 식사-기도-산책이 전부다. 당연히 심심하다. 하지만 원래 심심하려고 오는 게 피정이지 않겠나. 난 만족스럽기만 다.


아침밥을 먹고 보니, 1박 2일 일정서 할 건 거의 다 한 셈이 되어 버렸다. 어쩜‥아쉬웠다.  


이 이틀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노트북, 휴대폰 등 다 내려놓고 나 자신에 계속 집중하면 시간이 천천히 갔다. 따분함과는 달랐다. 오히려 시간이 더, 더, 천천히 흐르길 바랐다.


떠날 때쯤 되자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다시 사회에 내던져지는 느낌이랄까. 내가 그간 아무리 생활에 만족했다 한들, 그래도… 사회에 투척되긴 싫었다. 아니, 싫기보단 좀 부담됐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점심.  


별 수 없이 마지막 일정인 점심을 먹었다. 이때 나온 메뉴는 밍밍한 에다 부침개류 및 채소 반찬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메뉴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게 하나 있다. 역시 사람은 마음이 평온해야 한단 법이다. 이유인 즉, 여느 때보다 평온했던 이 순간, 나는 안 좋아하는 음식들을 보고 선뜻 '잘 됐다' 싶었다.


난 원래 밥을 상당히 빨리(혹은 급하게) 먹는 습관이 있다.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더 허겁지겁 먹는다. 근데 이렇게 정반대 반찬들이 나오니깐 문득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꼭꼭 씹어 먹어보자' 결심이 들었다.


덕분에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나물과 버섯 등을 일일이 음미하며, 일체 남김없이 식사를 마무리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라베르나 기도의 집 복도.


짐을 싸고 집으로 떠나야 하는 순간. 그러니깐, 사회에 다시 내던져지는 순간. 놀랍게도 오전에 가졌 싫고 부담스런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되레 새 마음이 생겨났다. 그전까진 존재하지 않던, 상상마저 못 했던  마음이었다. 속으로 혼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마음이었다.   


앞으로 더 좋은 일들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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