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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못정함 Jun 23. 2024

<동네 아저씨·아줌마 분석> 보고서

그놈의 '아는 형님'과 아줌마들의 뛰어난 논리력

※ 9년 전 취준생 당시 썼던 글을 그대로 옮겨 옵니다. 과거 티스토리에 올렸던 글 일부를 브런치로 옮기는 작업의 일환입니다. 오히려 취준생 땐 별별 소재로 글을 쓰고, 장난치는 게 더 잦았고 그만큼 재밌어했는데 말이죠, 초심을 되찾자는 의미로도 일단 함 옮겨와 봅니다.


며칠 전 엄마와 동네 먹태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어른들'을 주제로 잠깐 대화를 나눴다. 요지는 "나이 먹어도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 어릴 적 철없는 모습은 어른이 돼서도 변함이 없단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 몇 가지 구체적 특징이 있다면 ▲어른이 돼서도 남녀 고유의 '유치한 특성'은 그대로다 ▲이는 특히 40~50대 중반 사이에서 도드라지며(이르면 30대 후반) ▲같은 성향 사람끼리 잘 뭉친다 정도로 요약된다.


위 내용들을 종합해 <동네 아저씨·아줌마 분석> 보고서를 발간한다. 단순히 내 개인적 경험에 따른 결과물로, 온갖 선입견 등이 개입돼 신뢰성을 갖추지 못했단 점에서 유의미한 보고서다. 이번 연구물은 다채로운 자료를 참고해 완성됐다. 그간 동네 카페·술집 등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아줌마들의 대화 엿듣기가 바로 그것이다.



◆ 동네 아저씨들의 '아는 형님' 실체


무릇 철부지 남자 애들이 그렇듯, 어른인 동네 아저씨들 사이에서도 힘의 논리는 매우 선명하작동한다. 중고딩 때 남학생들 모습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누가 더 '강하냐'를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다만 중고딩 때와 차이가 아예 없진 않다. 동네 아저씨들 사이에서 '힘'은 주먹 세기가 아닌 정보력 등…걍 '체면'이다.


동네 아저씨들은 모르는 게 없다. 정치·경제·사회 분야를 비롯해 부동산과 지역사정 등 다방면에서 박학다식하다.


동네 아저씨들 간 힘의 논리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자신이 아는 정보를 상대방에 최대한 주입, 상대방이 "오~그렇구나"해야 이긴다. "그래~그렇다니까!" 말하는 사람이 완승이다.


문제는 그 정보란 것들이 대개 미덥지 못하단 점이다. 동네 아저씨들이 가진 정보는 주로 '아는 형님'에게서 나오는데, 실은 그 아는 형님이란 분도 자신의 아는 형님으로부터 해당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부동산 관련 정보에 대해 얘기할 때, 동네 아저씨들은 "내가 부동산에 정통한 아는 형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라고만 말할 뿐, 그 아는 형님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뭐하는 분인지는 잘 안 밝힌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형님은 무척 믿을 만한 사람이므로, 그 정보 역시 신뢰도가 높다고 힘줘 말한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동네 아저씨들의 정보원이 아는 '동생'이 아니고 '형님'이란 게다.


이는 추가 분석이 필요해 보이지만, 동생보단 형님의 정보라고 해야 체면이 서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보의 신뢰도를 높이는 착시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내가 아는 동생한테 들었는데"라고 말하면 존심이 안 선단 것. 어디 나보다 사회 경험도 나이도 적은 동생의 말을 믿고 떠들 수가 있겠냔 거다. 결국 동네 아저씨들 사이 힘의 논리에는 '나이'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동네 아저씨들은 늘 아는 형님을 말할 때 갖은 수식어까지 붙인다. "그 양반이 돈도 많고, 하여간 ~(중략)대단해"라는 식. 가끔 좀 과하다.


벌써 눈치챈 이들도 있겠지만 동네 아저씨들 간 힘의 논리의 꼭짓점은 결국 '인맥'이다. "특정 분야에 정통한, 대단한 이를 내가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과 어울릴 정도의 사람"이란 식으로, 자신이 그만한 인맥과 수준을 갖춘 자라는 신호를 은근히 보내며 과시하는 것이다.



◆ 아저씨들이 아줌마 못 이기는 이유


허나 동네 아저씨들은 동네 아줌마들을 이길 수 없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두 집단은 정보를 대하는 모습에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동네 아저씨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과장해 전달하는 반면, 동네 아줌마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날것 그대로 전달한다. 아줌마들이 상대적으로 진실 앞에 겸손하단 의미다.


동네 아저씨들은 힘의 논리(나이, 인맥 등)를 무작정 우선하다 불확실한 정보를 자칫 팩트로 둔갑할 때가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체면치레하려는 동네 아저씨들의 본능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걸 일단 들이밀어야 한다는 강박 탓이다. 


그러나 이러다간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더 잘 아는 형님'을 내세워 거세게 반박하면 금세 곤경에 처하고 만다. 아는 형님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단 사실을 잊은 자들에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어길 때면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동네 아줌마들은 다르다. 이들은 정보의 불확실성을 애써 포장도 부정도 않은 채, 있는 그대로를 먼저 내보낸다. 누구로부터 나온 카더라를 누구로부터 나온 카더라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투자에 대해 말할 때. 


동네 아저씨들은 아는 형님 발언을 인용하며 "야 두고 봐라, 저 A동네가 곧 엄청 뜬다니까"라고 소리친다.


반면 동네 아줌마들은 "누가 그러던데"라고 분명한 출처를 먼저 밝힌다. 그런 다음에야 "저 A동네가 곧 엄청 뜰 수도 있대"라고 전달한다. 


아저씨들은 '두고봐라'란 식으로 결론을 예단, 아줌마들은 '뜬다' 대신 '뜬대'로 말함으로써 확정적 판단을 유보한단 뜻이다.


아는 형님이든 누구든 제삼자를 거론 않고 자신의 경험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동네 아저씨가 본인이 타본 자동차에 대해 "그 차가 엄청 좋아. 승차감이 기가 막혀"라고 말했고, 상대방으로부터 "그 차 브레이크 고장이 잦다던데요"라는 반론에 부딪혔을 경우를 보자.


이때 동네 아저씨는 "그 차가 엄청 좋아"라고 운을 뗀 만큼 그 기조를 끝까지 끌고 가려한다. 때문에 '브레이크 고장이 잦다'는 반론에 재반박하며 더 세게 나간다. "야, 인마. 그거 다 헛소리야. 내가 타봤다고"란 식.


동네 아줌마들은 보다 진실성 있게 말한다. "그 차 브레이크 고장이 잦던데요"라는 반론에 부딪히면, "그렇긴 한데"라고 일단 먼저 인정한다. 그 후에 브레이크 고장의 단점을 만회할 더 큰 장점을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브레이크 고장이 잦긴 한데, 에어백이 좋다"고 항변하는 형태랄까.  


이런 점들로 미뤄보아, 통상 말빨에선 아저씨들이 아줌마를 이기기가 힘들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 억지가 논리를 이길 수는 없다.  



◆ 동네 아줌마들의 '사람 관심' 


동네 아저씨들이 정보력과 체면치레 등 사실 별 쓸모 없는 '무형'의 가치에 무게를 싣는다면, 동네 아줌마들은 주변 사람 등 '유형'의 가치에 가중치를 더 두는 것으로 분석된다.


동네 아줌마들은 자신들의 자녀, 지인, 남편 등 주변 사람에 관한 얘기를 주로 한다.


자녀 얘기는 단연 빼놓을 수 없다. 아이의 학습 수준 전반을 비롯해 학교와 학원생활을 중심으로 한 정보공유가 흔하다. 이 대화의 패턴은 주로 본인 자녀의 공부실력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하지만, 그 끝은 결국 자기 자식이 갖춘 다른 장점들을 자랑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가령 "공부는 못하는데, 공을 잘 차" 등.


그런데 언뜻 당연하게 보이면서도 조금 놀라운(?) 현상이 하나 있다. 동네 아줌마들은 '잘생긴 남자'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한다. 이성에 관한 얘기를 동네 아저씨들보다 많이 나눈다. 의외다. 이는 현재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족이 동네 아저씨들보다 더 큰 데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동네 아줌마들 입에서 등장하는 잘생긴 남자들은 운동 강습소나 알바현장에 주로 포진해 있다. 이들은 키도 크고, 등빨도 좋은 남자들이다.


다른 놀랄만한 점은 동네 아줌마들은 그들이 친절하던 불친절하던 상관 안 한다는 점이다. 성격 얘기는 잘 안 한다. 


문제는 그런 잘생긴 남성들 틈바구니에서 희생양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남편들, 즉 동네 아저씨들이다. 남편들, 아니 동네 아저씨들은 집안일도 안 하면서 반찬투정까지 한다. 그 업보 탓에 동네 아줌마들의 테이블에서 너덜너덜해진다. 하이에나 무리 속 얼룩말이 돼 버린 듯. 내 남편, 네 남편, 친구 남편 따로 말할 게 없다.


동네 아줌마들은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들 입에선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 말고 연애만 하고 싶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대체로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여자가 남자에 갑(甲)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연애 때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음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점들을 반영, 동네 아줌마들과 동네 아저씨들의 다른 차이점 중 하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동네 아저씨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동네 아줌마들은 그런 노력에 비교적 소극적이다. 대신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걸 추구한다.  



◆ 몇 안 되는 공통점, 어깨가 무겁다


그래도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도 공통점은 있다. 나이를 먹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남녀를 떠나 사람이라면 지닐 수밖에 없는 특유의 유치한 특성이 있다. 아저씨, 아줌마 모두 집 갈 때 표정이 꼭 같다.  


중·고딩/대딩/취생 등 젊은 세대들이 의외로 진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저마다의 고민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토로한다. 모이기만 하면, 모두가 경청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서로 위로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들은 자리를 끝마치고 집에 갈 때 표정이 썩 어둡지만은 않다. 딥한 대화를 나눈 만큼 작별이 아쉬울 법도 한데, 오히려 태연한 표정으로 헤어진다. 쿨하게 "즐거웠어~잘 가! 또 보자!"한다.


그렇지만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은 작별 때 표정이 영 안 좋다. 별로 유익한 대화도 안 나눴으면서  "좋은 시간 다 끝났다"는 듯 집에 가기 싫어한다. 마치 어린아이 때로 되돌아간 듯, 신나게 놀다 엄마 손에 끌려 집 갈 때의 그 표정 일색이다.


방금 전 내 옆에 앉은 동네 아줌마들 5명은 주변 아랑곳 않고 실컷 떠들더니 약 1시간 30분만에 자리를 떴다. 


그중 한 동네 아줌마와 화장실 입구에서 마주쳤는데, 아까 본 그 동네 아줌마가 아닌 것 같았다. "카페야! 떠내려가라!" 왁자지껄이었던 분이, 어느새 웃음기가 다 사라졌다.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온 아이의 옷매무새를 쭈그려 앉아 가다듬더니,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아이는 "드디어 집에 간다"고 신난 표정인데, 이 아주머니는 어깨도 발걸음도 꽤 무거워 보였다. 동네 아줌마는 더 놀고 싶었나보다. 돌이켜보면 동네 아저씨들도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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