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 1992
내가 일찍 태어나 이 영화를 소년시절에 감상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아마 극장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어쩌면 계절이 지나도록 이 영화를 생각하며 상상하고 또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당연히 배트맨을 떠올리길 좋아했을까?
아니면 혹시 못되고 못생긴 펭귄맨을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까?
(‘펭귄’이 맞지만 그의 부하?친구?들과 구분하기 위해 일단 펭귄맨이라 호칭)
어쨌든 이제 와서 이런 영웅서사에 흠뻑 빠져들기에는 뒤늦은 감이 있고 또 놀란의 시리즈에 익숙한 내가 또 다시 배트맨 비긴즈를 재학습하긴 귀찮아서 1편은 스킵했다. 내가 이 영화를 찾아본 건 우선 크리스토퍼 워큰이란 배우를 좋아하고 또 재밌게 본 ‘스타더스트’같은 영화에 출연했던 미셸 파이퍼... 그들의 젊은 시절 연기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팀 버튼이란 이름도 빼놓을 순 없겠지(최근으로 올수록 영화들이 시시해지긴 했다만)
영화 자체로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꽤 기대를 했더라도 실망스러웠을 것 같지는 않다. 비록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감성으로 감상하긴 했지만 <배트맨 리턴즈는>는 무척 좋은 영화다. 영웅서사에 도취되지 못하더라도 영웅이 아닌 인물들에게서조차 뭔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뭔가는 장르적으로 소비되는 카타르시스가 아닌, 진짜에 가까울 것 같은 감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2편에 이르러 놀란이 원하는 스타일을 완성했다면(그 시리즈 전부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다크나이트는 시각적으로 매혹되고 압도되는 경지를 부정하기 어렵다.) 아마 팀 버튼 역시 시리즈의 2편에 이르러서 자신만의 감성이나 스타일을 온전히 발휘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그만큼 팀 버튼에 의해서 복제되고 답습되는 팀 버튼이 아니라 <배트맨 리턴즈>는 <가위손>같은 영화에서 느껴지는 팀 버튼 고유의 팀버튼스러움이 ‘살아있다.’ 현실과 괴리된 팀 버튼의 세계가 그 자체로 영화 안에서 생명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배트맨 중심의 영웅서사라기보다
‘팀버튼스럽게’ 동심의 다크사이드에 어필하는
박쥐, 고양이, 펭귄 이렇게 세 주인공이 활약하는 크리스마스 환상동화라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중에서도 펭귄맨이 내러티브의 중심을 이끌어나간다.
영화 오프닝 펭귄맨의 탄생부터 다뤄지는 걸 보고 다크나이트처럼 빌런부터 소개하나 여길지 모르지만(내가 그렇게 생각했나?)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펭귄맨의 꿈과 희망, 좌절과 복수가 진정한 서사의 축이며 그러므로 서사의 절정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면 펭귄맨을 단순한 빌런 취급할 게 아니라 어느정도 관심을 기울이며 바라볼 필요가 있다.
캣우먼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는 이 영화에서 펭귄맨과 캣우먼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솔직히 배트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만 해도 나중에는 결국 펭귄맨과 캣우먼, 배트맨 모두를 이해하고 그들의 얽히고설킨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다.
펭귄맨은 부잣집의 아기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기의 양 손은 흉측한 집게 모양이라서 그런 이유로 하수도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집게손 덕분에 펭귄맨은 서커스단의 구경거리로 암울한 소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서커스단의 동료들, 펭귄부하들과 함께 탈출해서 다시 하수도로 내려왔을 것이다. 지하에 서식하게 된 펭귄맨과 무리들은 말 그대로의 사회최하층, 도시 밑바닥 그보다 더 아래의 어글리한 존재들이다. 펭귄맨은 고담시를 파괴하거나 도덕적 실험 따위를 강제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저 크리스마스에 부모를 되찾아 고담시의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펭귄맨은 착하지도 않다. 무식하고 멍청하고 먹는 것과 여자만 밝힌다.
캣우먼은 펭귄맨보다야 훨씬 높은 계급이라 볼 수 있겠지. 허나 고담시의 높은 빌딩 안에서 그녀는 커피나 갖다 바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또 고양이 밥이나 갖다 바치고... 가족도 없이 남친도 없이 회사와 집을 오가며 ‘커피주고 고양이 밥 주고’ 그러면서 지낸다. 어느 날 그녀는 회사의 권력을 쥔 남성에 의해 빌딩 밖 도시바닥까지 추락해버리고 그러나 아홉 개의 목숨을 지닌 캣우먼으로 부활한다. 직장생활의 불합리와 더불어 전남친들에 대한 분노 또한 그녀를 캣우먼으로 변신시킨 힘이었을 수 있다. 캣우먼은 고담시의 남자들을 혼내주고 싶어 한다.
21세기, 현재의 시선으로 보자면 캣우먼은 꽤 긍정적인 빌런으로 비춰질 수 있다. 관객들은 공감하거나 또는 응원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펭귄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관객 입장에서 도무지 좋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캐릭터다. 말했다시피 그는 무식하고 멍청하고 먹는 것과 여자만 밝힌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은 앙갚음을 하고자 사람들을 해치려 든다. 솔직히 나도 가끔은 내가 무식하고 멍청하고 먹는 것과 여자만 밝히는 녀석이지 않을까라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뭐 그럴 수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나도 다른 사람들을 재거나 평가하지는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에 대해선 비교적 자유롭게 뒷담화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보다 더 너그럽게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 입장에서 이해해보려는 측면이 있다. 현실에서는 때로 그게 어려울 수 있으니까... 왜 얘기가 샜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못되고 못생긴 펭귄맨을 영화 속에서나마 이해해보려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위험하거나 부도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화제를 돌려, 이 영화의 조악한 특수효과와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미장센이 현재 관점에서는 딱히 멋지지도 않고 오히려 헛웃음이 나오거나 키득거릴법한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유치해 보일 거라는 걸 이 영화 스스로도 알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조악함과 유치함과 촌스러움으로 이 영화는 끝내 아름다운 미장센과 무드와 고유한 감성과 감동까지도 이룩한다. 지금은 팀 버튼 본인에게서조차 찾기 어려워진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기괴한 아름다움이 이 영화에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팀 버튼은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타자에 가까운 악당 펭귄맨에게 남들이 뭐라든 간에 자신만의 감정과 공감능력을 불어넣는다. 영화 속 펭귄맨은 가장 비참한 인간이자 소년으로서 살아있다.
성탄절에 예수님 말씀을 되새겨 그늘진 곳의 이웃들을 돌아보자는... 그 진부한 테마를 연상시키는 엔딩조차 바로 그런 까닭으로 피상적이거나 가식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런 테마를 관객들에게 전달할 자격이 있다. 혹자는 밝은 곳의 행복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어두운 곳의 비참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나름의 세계에 충실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배트맨 리턴즈>의 배트맨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배트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