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2009
"실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글을 쓸 시간이 15분 밖에 없습니다. 부속문서 또한 보아주십시오.
오늘 내가 자살하다면 생활고 때문이 아닙니다. 일까지 마다해가며 돈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린 것은 정치적 신념 때문입니다. 늘 내 앞길을 막아온 페미니스트들을 창조주께 되돌려 보내려 합니다. 지난 7년간의 삶은 낙이 없었고 지긋지긋했습니다 (blasé). 이제 그 목소리 큰 여자들(viragos)에게 종말을 선사하려 결정내렸습니다.
어릴 때 학사장교 시험에 응했었습니다. 무기고 출입이 자유로워지면 테러를 감행하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탈락했습니다. 비사교적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나는 내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오늘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사이, 나는 공부를 계속했습니다만 들쭉날쭉이었습니다. 전혀 흥미롭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내 운명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매우 우수했습니다. 과제물 제출도 안하고 시험공부도 소홀했는데 말입니다.
언론은 제게 ‘미친 살인마’라는 낙인을 찍겠지만, 저는 제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학식있는 사람이라 여깁니다. 단지 사신(死神, Grim Reaper)이 내려와 제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끔 강압했을 뿐입니다. 도대체 왜 살기 위해 참아내야 해야합니까? 그저 나라 좋자고 하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과거지향적이기에 (과학을 제외하면), 페미니스트들은 항상 나를 격노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여성의 이점은 지키기 원하고 (저렴한 보험, 장기 모성 휴가 및 연장 휴가), 남성의 이점을 여성들 자신을 위해 갈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올림픽마저 남녀 구별을 없앤다면, 이 우아한 대회에 오직 여성만 있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장벽을 허물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남성들에 의해 오랜 세월 축적되어 온 지식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그들 자신을 왜곡시켜 드러내려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언젠가 듣기로는, 그들이 세계대전 중 최전방에서 싸운 캐나다 남녀에게 훈장을 수여한다고 합니다. 여성은 최전방에 투입되도록 승인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시저의 여성 군단과 갤리선의 여성 노예가 역사적 전력(戰力)의 절반을 당연히 담당했다는 말을 듣게 될 날이 오는 겁니까? 존재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개전(開戰) 명분은 충분합니다(A real Casus Belli).
너무 짧게 써서 죄송합니다.
마크 레피네"
위키백과에서 긁어온 그의 유서다.
1989년 캐나다 몬트리올 폴리테크닉대학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극영화화한 2009년 드니 빌뇌브의 <폴리테크닉>은 도입부에서 이 유서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범인 마크 레피네 역을 맡은 배우 맥심 고데트의 음성을 통해 낭독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우선 범인 마크를 바라보면서 시작한다.
사건당일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의 번민?과 범행에 돌입하는 순간까지를 흑백의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발레리라는 여학생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그녀는 학살의 피해자이며 학살의 생존자가 될 것이다.
그날 인턴채용 면접에 치마를 입고가기 위해 다리를 면도하는 모습부터 면접관이 여자는 출산 후 일을 그만두지 않겠냐는 말에 상처받고 친구에게 속상함을 털어놓는 모습까지, 참상의 한복판에 놓이기 직전까지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학살을 선정적으로 다루기를 원치 않았고
(당연히 그런 비난도 원치 않았을테고) 흑백을 선택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학살이 진행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함에는 부족함이 없어서
만약 앞서 유서내용 일부에 일말의 논리라도 있다고 느낀 사람일지라도 이 모든 걸 지켜보면 범인은 그냥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또라이라고 선을 긋고 싶어질것이다.
영화도 가해자에게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는 것 같다.(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을 극영화로 재현한다는 시도는
왜, 왜 그랬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심정으로 그 자의 내면에 카메라를 들이댈 법도 하건만 현실적으로는 묻는다고 답해질 성질이 아니고 그렇다고 섣불리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고 상상하겠다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심정을 주목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다큐가 아닌 극영화여야만 했을까?
또 한 명의 피해자, 그날 그장소에 있었던 남학생 세바스티앙이 등장한다.
끝까지 발레리와 다른 여학생들을 구하려 했던 그는 열네 명의 여성을 사살하고 자살한 범인 마크의 몫까지 대신해 죄책감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다가 사건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살아남은 여학생 발레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한다.
마크의 유서로 시작한 영화는 발레리의 편지로 끝을 맺는데 같은 감독의 다음영화와 겹쳐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편지에서 그녀는 남자아이를 낳는다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여자아이를 낳는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라고 얘기해 줄거라고 결심한다.
이 영화는 극영화로서의 상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반면
이 영화를 두고 가해질 여러 입장의 목소리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누군가는 온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특수한 사이코패스에 의해 저질러졌다 할 것이고...
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이 영화가 그 덕분에 얼마나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한 것 말고는 딱히 얘기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즉흥적인 리뷰를 쓰면서까지 이 영화가 취한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에 동조하게 된다.
어렵다.
영화가 아닌 현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