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 여행
연휴 기간 동안 가오슝에 다녀왔다. 사실 딱히 어딜 가려던 건 아닌데, 연휴 때 집에서 TV만 보기 싫다는 아빠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갑작스레 결정했다. 화요일 오후 비행기표 구입. 금요일 출발. 지진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그럴 일 없다"는 아빠의 단호한 믿음을 따르기로 했다. 카메라도 작은 카메라 한 대만, 짐도 최대한 줄이고, 면세점 쇼핑도 안 하고!!!! 여행 일정도 대강대강 세운 뒤, 그냥 떠났다.
공항에서부터 시내까지 진입하는데 지하철로 20분이면 충분한 도시. 아직 타이베이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도시. 곳곳에 야시장이 있는 도시. 도심과 휴양지를 모두 느낄 수 있는 도시. 딱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따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족스러웠던 도시.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욕심도 없이 그저 슬렁슬렁 걸어 다니기 좋았던 곳. 더우면 실내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심심하면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 구경하고, 다리가 아프면 잠시 앉아서 쉬다가, 또다시 발길 걷는 대로 걸음을 걸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매일 저녁 마주하던 노을이 참으로 아름답던 도시. 낮에는 습하다가 흐리다가 해가 나는 등 오락가락하는 날씨였지만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노을을 볼 수 있었다. 어쩜 그리도 예쁘게 내려앉던지. 분홍 빛이 푸른빛과 합쳐서 보라 빛이 되고, 태양이 붉게 타들어가다 결국에는 어둠을 몰고 오는 모습은 매일 저녁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노을과 야경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나에게 딱 맞는 여행지였다.
가오슝에는 야시장도 참 많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리우허 야시장'과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루이펑 야시장' 외에도 도시 곳곳에 야시장이 선다. 원래 리우허 야시장과 루이펑 야시장 둘 다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맡은 강력한 취두부 냄새에 루이펑 야시장을 포기했다. 웬만한 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취두부 냄새는 정말 강력했다. 그래서 냄새 없는 리우허 야시장만 3일 내내 방문했다.
가오슝 근교에는 대만 최고의 불교 사원인 불광사와 불타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부처님의 치아사리(진신사리)와 1,000명이 동시에 예불드릴 수 있는 대웅보전, 그리고 동남아시아 최고 높이의 불상(120m)으로 유명하다. 대만도 춘절(설 연휴) 기간이라 여러 가지 이벤트가 많았는데, 포춘쿠키처럼 법어 쪽지를 뽑는 공간이 있었다. 원래 쪽지 내용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옆에 계신 안내자분이 해설을 들을 수 있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스님 한 분이 내 쪽지를 보시더니 법어 내용을 해설해주셨다. 욕망과 멀어져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Detachment from desires enhances your spirit.
하지만 욕망과 멀어지라는 말을 들은 그 날 저녁. 나는 길거리에 진열된, 크기가 내 몸만 한 티거 인형에 마음을 뺏겼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행복이지만, 욕망을 통해 갖는 것도 행복이지 않을까.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갖고 싶지만 지금 당장 살 수 없으면 나중에 사고. 뭐 그런 소소한 즐거움.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니체의 초인 수업 中
글쎄올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조언들이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다. 정답은 없다.
천천히, 느릿느릿 여행하던 그 순간도 좋았지만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니 더더욱 좋다. 습기 찬 바람과 뜨거운 햇살과 복작거리던 소음과 매일 저녁 감탄을 불러일으키던 노을까지. 고작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저 노을이 벌써 그립다. 우리나라 겨울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고 얼른 따뜻한 봄바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세먼지도 없었으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인생과 세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인생과 세계는 무의미한 고통에 차 있다고 여기고, 대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리가 죽어서 갈 천국이나 미래의 공산주의에서 찾곤 하지요.
그러나 니체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사는 것, 매 순간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실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 수업 中
반복되는 하루의 패턴이지만 어쩐지 더욱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오늘. 글을 쓰면서 잠시 동안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했으니 이제는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공간과 이 순간에 집중할 차례다. 추억을 먹고 다시 한번 힘을 내볼까나. 영차.
2018.02.27
(번외)
구글로 검색하다가 불광사에서 욕망, 행복과 관련된 콘퍼런스 때 있던 키노트를 찾았다.
어쨌든 여유로움, 욕망, 행복의 키워드를 남긴 여행이었으니 나중에 생각날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
오직 욕망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찾는 데 희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Only by liberating ourselves from the shackles of desire can there be hope in finding true happiness and peace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와 명성을 추구하지만, "소유"대신 "즐기는 것"으로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While most people pursue wealth and fame, they need to know that a beautiful life with a broader vision can be attained by “enjoying” instead of “possessing.”
(욕망으로부터) 더 많이 분리될수록, 당신은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정의 할 수 있습니다.
The more detached you are, the more concentrated you can be, and thus, the more you are able to redefine the meaning and value of life.
분리와 만족의 의미란 : 삶에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마음속에서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에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며, 몸과 마음을 단련(수행)해 만족의 행복과 부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와 만족은 진실한 부이며, 분리와 만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행복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Detachment and contentment means: there are things we should do, things we should not do in life; there are things that we should desire, things we should not desire in our minds. When we can be content, we will not be enslaved by life and will be able to settle both body and mind to enjoy the wealth and happiness of contentment. Therefore, detachment and contentment are true wealth, and people who understand detachment and contentment will naturally have happiness and peace in life.
2012 BLIA General Conference Keynote Speech Fo Guang Shan, Taiwan October 11-14, 2012
http://www.hsilai.org/en/eAbt/eAbtFDKS2012.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