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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융 Nov 15. 2017

오카야마 부녀(父女) 여행 #7

#7 에필로그

안녕, 오카야마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전 10시 30분 출발이었다. 따듯한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오카야마 역으로 향했다. 오카야마 역. 처음엔 낯설었던 공간인데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상을 마음껏 느끼면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전 8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시골의 작은 공항. 처음 도착했을 때 받은 느낌 그대로였다.

체크인을 마쳤을 무렵의 시간은 8시 20분. 너무 일찍 와 버렸다. 구경할 것 없는 공항에서 두 시간을 때워야 했다. 이제 집에 간다는 걸 몸도 아는 걸까. 아침인데도 몸이 무거웠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안녕, 오카야마


아주 느릿느릿 걸으며 공항을 구경했다. 딱히 구경거리가 없었지만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신기했다.

면세점엔 뭐가 있을까. 기대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으나 마주한 풍경은 작은 상점. 딱 그 정도였다. 오카야마 역에 자리 잡은 상점들보다도 작은 규모. 한 바퀴를 다 도는 데 5분이 걸렸다. 아직 비행기가 뜨려면 한참 남았는데. 조금 더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수중에 남은 돈은 만 엔. 언젠가의 여행을 기약하며 도로 가져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 천천히 돌아보니 또 살 게 보였다. 집에 가져갈 과자부터 아빠 회사에 보낼 과자, 초콜릿, 사케, 오카야마 복숭아로 만든 술 등등. 두 손 가득 쇼핑을 마친 후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았다. 그러고도 60엔이 남았다. 면세점에 있는 기부함에 넣었다. 땡 그르르. 동전끼리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탈탈. 정말 다 털었다.


잔고는 0원이 됐지만, 마음은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알고 보니 아빠는 사람들한테 나름의 자랑을 했던 것 같다. 딸이랑 둘이 가는 여행이라고.

그렇다면 자랑을 들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표시를 해야지. 분홍색 포장이 특히 맘에 들었던 쿠키 몇 박스를 샀다. 회사에 돌리라며 아빠에게 건네줬다. 무심한 듯, 정성스럽게.


*선물하다 :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
*선사하다 : 존경, 친근, 애정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남에게 선물을 주다.


존경할 수 있고, 친근감을 드러낼 수 있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건 실로 감사한 일이다. 스스로 번 돈으로 선물을 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소중한 일이다.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 되어보니 알게 된다.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누고 싶고, 더 많이 함께하고 싶어 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몫을 잘 해내야 하는 거겠지. 한 사람의 사회인, 또는 직장인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풍성하게 존재하기


한동안 무기력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도 흥미롭지 않았다. 책 읽는 시간이 유일한 위로가 되던 때, '모모'를 읽었다. 허구의 이야기였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고,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갖는 것'이라고 믿는 회색 사람들. 이들은 '낭비되는 시간'을 저축해서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사람들을 꾀어낸다. 이들이 말하는 낭비된 시간이란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 서로의 근황을 묻는 시간, 생각에 잠기는 시간 등 '효율적이지 않은' 모든 시간이다. 한 명 한 명, 사람들은 그런 꾐에 넘어가고 세상은 점점 삭막해진다. 모두 "시간이 없다, 바쁘다"며 열심히 일하지만 행복과는 멀어지고, 모두가 성공을 갈망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에게 만족하지 않는다.


모모의 친구들도 이 새로운 규정을 따라야 했다. 그들은 각기 속한 구역에 따라 서로 갈라져 여러 탁아소로 보내졌다. 여기에서 스스로 놀이를 창안해 놀 수는 물론 없었다. 놀이는 감독하는 사람이 정해주었는데, 한결같이 어떤 유용한 것을 배우는 놀이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들은 다른 무엇을 잊어 갔다. 그것은 기뻐하고, 열광하고, 꿈을 갖는 일이었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귀 기울일 줄 아는 모모. 모모는 호라 박사를 만나 회색 사람들이 뺏어간 시간을 찾아오고자 한다. 호라 박사는 말한다.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에 회색 무리의 유령 같은 죽은 시간이 뒤섞이게 된단다. 인간들이 그런 시간을 받게 되면,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병이 들게 돼. 죽을병에 걸리게 되는 거야."

모모는 당황하여 호라 박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조그맣게 물었다.

"무슨 병인데요?"

"처음에는 거의 증세를 못 느끼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엇에고 의욕을 잃어버려. 재미있는 일이 없고 노상 지루하기 짝이 없게 돼. 게다가 이 불쾌감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늘어가는 거야.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지. 기분이 나쁘게 느껴지고, 마음이 비어 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불만스럽게 느껴지는 거야. 그러다가 이런 느낌조차 점점 없어져 결국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돼. 완전히 냉담해져 회색이 되어 버리는 거야. 온 세상이 그에겐 낯설게 느껴지고 전혀 상관없게 되지. 화낼 것도 열광할 것도 없어져.
기뻐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게 되고 웃는 것과 우는 것을 잊어버리는 거란다. 그리고 나면 그의 마음은 싸늘해지고, 아무것도,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돼. 이 정도까지 증세가 악화되면, 그 병은 불치의 병이야."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어느덧 졸업한 지 3년. 점점 '사회인' 또는 '직장인'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던 학생 때와는 다르다. 하고 싶지 않음에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보고 싶지 않음에도 봐야 하는 사람도 있다. '삶은 고통'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체념한 것은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과정, 거기에도 분명 소소한 행복은 있으니까. 그러니 매 순간의 사소한 즐거움을 쌓아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게다가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은 하기 싫은 일이 되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그럭저럭 괜찮은 일이 되기도 한다. 삶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늘 좋을 수는 없는 것.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 알 수 없는 것. 의문스러운 것. 그래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것. 삶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받아들여가는 중이다. 그렇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알 수 없다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희일비하지 않되 그 순간에 풍성하게 존재할 줄 아는 사람.

동시에 주변 사람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참으로.


거품3, 맥주7. 그런 행복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우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이 추억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을 고하며 맥주 한 캔을 마셨다. 맥주 거품이 아주 적절했다. 


아빠와 단 둘이 떠난 첫 여행은 그렇게 추억이 됐다.


안녕, 오카야마.

그리고, 다시 일상이다.



지난 글 보기

#1 프롤로그

#2 어른 두 명

#3 처음 해보는 일 

#4 무조건 좋을거야

#5 뜻밖의 행운

#6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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