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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융 Nov 12. 2017

오카야마 부녀(父女) 여행 #5

#5 뜻밖의 행운


사람 잡는 '설마'

우리가 이에우라 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태우지 않고 떠나간 배는 또다시 어딘가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그 시간대에 도착한 마지막 손님 같았다. 


우리를 놓고 떠나간 배는 그렇게 또다시 떠나갔다.
고요하던 이에우라 항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데시마 섬의 첫인상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마저 느껴지던 섬.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안내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데시마 섬에 온 가장 큰 목적,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신나게 걸어가는데 맞은편의 자전거 대여소에 걸린 안내판이 보였다. 'Sold Out'이라고 써져 있었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하지만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안내데스크에서 들은 답변은, 오늘 이 섬의 모든 자전거가 다 나갔다는 거였다. 데시마 섬에는 몇 군데의 자전거 렌탈샵이 있는데 오전 9시에 이미 다 매진됐다는 거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제발 다시 한번만 확인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직원은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는 그 순간에 제발 2대만 남아있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랬던지.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어떻게 할 수 없단 대답이 돌아왔다. 


힘이 빠졌다.

자전거 타는 풍경 하나만 생각하면서 이 섬에 들어왔는데, 가장 하고 싶던 걸 할 수가 없다니. 풀이 죽었다. 직원은 자전거 대신 투어버스를 타고 섬을 구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차간격이 길어서 버스를 타려면 1시간 5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내가 가고 싶은 데시마 미술관 까지는 약 4km. 걷는다면 한 시간 조금 더 걸릴 거리였다. 직원은 그냥 주변을 둘러보다 버스를 탈 것을 권했지만. 우리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구글맵으로 방향을 확인하며 걷기 시작했다.

아빠는 시무룩해진 내가 안타까웠는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걸으면 어떠냐. 자전거를 탔을 때는 못 보는 풍경들을 또 볼 수 있잖아"

"그건 그래"

"천천히 걸어보지 뭐."

"근데 나 일단 배가 고파!!(눙물)" 



좋은 건 어디에나 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경관 좋기로 유명한 우미노 레스토랑이 보였다. 

아빠는 그 옆의 데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저기에서 점심 먹자."


잔잔한 파도도 치지 않는, 커다란 호수 같던 곳.

통발을 거두어들이는 늙은 어부와 작은 통통배가 그림 같던 곳.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도시락과 맥주를 알차게 까먹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선선하니 딱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통발을 거두어들이는 어부
도시락과 함께한 맥주 한 캔.


자전거 못 탄 대신 이렇게 멋진 곳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잖아.
너 이런 데서 도시락 먹어봤어?

”아니. 여기 진짜 예쁘다. “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마주한 순간.

이건 또 나름대로의 추억이 될 테다.

예쁜 풍경을 보면서 배불리 먹고 나니 그새 다시 행복해졌다. 다시 기운을 내서 걸어가기로 했다.

굽이굽이 산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걸어가던 커플. 예뻐서.



뜻밖의 행운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점점 심해지는 경사에 조금씩 숨이 차오를 무렵이었다. 

작은 차 한 대가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에 농담처럼 히치하이킹을 하자고 했었는데, 이건 차가 우리한테 히치하이킹을 한 꼴이었다. 운전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데시마 뮤지엄?"이냐며 물었다. 아마 목적지를 묻는 것 같았다. 맞다고 대답했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타실래요?"

"네!"


차를 타고 가며 느꼈다. 이 길을 걸어서 왔더라면 우린 오늘 쓸 수 있는 모든 체력을 다 써버렸을 거라고.

뜻 밖에 마주한 행운에 '이만하면 괜찮지'라고 생각할 무렵, 한참 동안 올라가던 차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오카야마로 떠나온 이유. 데시마 뮤지엄 가는 길의 풍경. 설렘 지수가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출처 : 세토우치 예술제 공식 홈페이지

데시마 미술관은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와 아티스트 '나이토 레이'가 세운 미술관이다. 데시마 섬 언덕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미술관으로 향하다 보면 계단식 그 앞에 논과 바다가 펼쳐진다. 자연과 건축, 예술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장관이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입장료 1인 1,540엔)


그래, 여기다. 내가 그토록 오고 싶던 곳.
탁 트인 풍경.
계단식 논


이 풍경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참으로 눈부신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 과정에서 이미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될 때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행복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움켜쥐고 있으니까 당연히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거에요.


행복의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길만 고집한다면 도리어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인연 따라 지혜롭게 대처할 때 행복도 찾아옵니다.
- 법륜스님 '행복' 중에서


그래.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비록 배를 놓쳤고, 자전거를 빌리지 못했지만

근사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우연히 차를 얻어 탔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 

우연히 마주하게 될 모든 순간들을 환영하리라 다짐하며, 두 번째 목적지인 '심장소리의 아카이브'를 향해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어떤 풍경, 어떤 인연과 마주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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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2 어른 두 명

#3 처음 해보는 일

#4 무조건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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