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른 두 명
오카야마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오카야마 역으로 이동했다. 오카야마 역은 오카야마 모든 교통수단의 집결지다. JR열차, 신칸센은 물론이요 버스, 전차, 트램, 택시까지 각종 탈 것들이 모이는 장소다. 역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 통로가 있는데, 동쪽 통로로 나가서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면 전차와 트램을 탑승할 수 있는 정류장이 나온다.
체크인을 마치고 그새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 데미가츠동 집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을 먹을 식당은 80년 전통의 '아지츠 카사노무라'. 오카야마 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식당으로 들어가면 입구 앞에 바로 자판기가 놓여 있다. 이 곳에서 메뉴를 선택하고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으면 된다. 음식은 비교적 빨리 나왔다. 가게가 크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이 앉아서 식사 하기에도 무리는 없었다.
오카야마에서의 첫 식사에는 역시나 맥주가 함께 했다.
아빠한테 맥주 맛있게 따르는 법을 배웠으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컵을 적당히 기울이고 적당한 속도로 맥주를 따르라는데 쉽지가 않았다. 아빠가 맥주 7과 거품 3의 황금비율로 다시 따라준 맥주는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술을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아한 때가 있었다. 아빠가 술 한 잔 마시자고 해도 맛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런 때. 시간이 지난 요즘, 이제는 제법 맥주를 즐길 줄 안다. 특히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의 해방감이란. 캬.
아빠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음료수와 맥주가 부딪히던 잔에는 어느덧 맥주만 가득 찼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와 술을 마신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궁금해진다.
오카야마 도로 중간에는 전차와 트램이 다니는 길이 있다.
노면전차는 올해로 운행을 시작한 지 105년이 됐다고 한다.
알록달록 색칠된 외형과는 달리 전차 내부에는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다.
특이한 건 우리와 반대인 탑승 시스템이다.
운전석 뒷문으로 탑승해서 운전석 쪽 문으로 내린다.
뒷 문에 탑승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동전 교환대. 처음에는 이 곳에 돈을 넣고 탑승해야 하는 줄 알았다. 힘껏 동전을 밀어 넣었으나 들어가지 않았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일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친 한 명에게 무작정 물어봤다. 그분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운전사가 있는 앞 쪽을 가리켰다.
아, 내릴 때 돈을 내라는 말이구나. 이해했다.
덜커덩 거리며 운행하다가 때로는 '끼익-' 하며 멈추는 전차를 타고 오카야마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오카야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고라쿠엔과 오카야 마성으로 이동할 때에도 전차를 타면 편하다. 시로시타 역에서 내리면 고라쿠엔과 오카야마로 향하는 표지판이 바로 보인다.
(고라쿠엔 정문이라 적힌 표지판을 따라가면 고라쿠엔 정원이 나오고, 고라쿠엔 남문이라 적힌 표지판을 따라가면 오카야마성이 나온다. 우리는 남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소나기가 내렸다. 카페에 들어가서 잠시 쉬고 싶었지만 곧 그칠 테니 그냥 가자는 아빠의 말에 따랐다.
곧 그친다는 아빠 말처럼 10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비가 멎었고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고라쿠엔은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다.
1686년부터 시작한 정원 조성은 14년이 지난 1700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사와노이케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곳곳에서 기모노를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장소라더니 모두들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고요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가득하던 정원.
열 발자국을 채 걷지 못했는데 자꾸만 아빠가 불러 세웠다.
"거기에 서 봐. 사진 잘 나오겠다."
다시 열 발자국쯤 걸었을까.
"거기도 멋있다."
또 몇 발자국 못 가서
"이 나무랑도 같이 찍어줄게."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눌려졌다.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사진을 찍는 아빠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부터 우리 집에는 카메라가 많았다. 화면을 위로 들어 올리는 옛날 캠코더라던가, 필름 카메라의 스테디셀러인 니콘 FM2라던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에서 아빠가 사 왔다던 카메라들. 덕분에 어린 시절 추억들이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져 있는데, 사진 찍는 순간 아빠의 레퍼토리는 늘 한결같았다. 여기를 보라고 말한 후에도 한참을 기다리다 사진을 찍었다. 햇빛을 마주 보다 지쳐버린 눈동자가 스르륵 감길 때쯤, 그제야 아빠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했었다.
"자, 카메라 보고, 하나, 둘~ 셋!"
이제는 얼마든지 쉽게 누르고 쉽게 지울 수 있는 사진인데도 아빠의 사진 찍는 속도는 여전하다. 아빠는 한참 동안 구도를 잡고 또 한참 동안 기다린다. '그냥 찍고 지우면 안 될까?'라는 말은 먹히지 않는다. 아빠에게는 아빠만의 세계가 있다. 나는 닮은 듯 아닌 듯 아빠를 닮았다. 유전일까? 카메라 같은 기계들을 좋아하고, 사진 찍고 영상 만드는 걸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도 나만의 세계가 있다.
'카메라'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일이다.
열여덟 살 때 일이었다. 산 지 1년도 되지 않은 DSLR 카메라를 잃어버렸었다. 카메라를 어깨에 맨 채로 잠실역 지하상가를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그만 어느 가게엔가 놓고 나온 것이다. 어깨가 허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한 시간도 넘게 지나있었고, 혹시나 하며 다시 찾아간 가게에서는 그런 물건을 본 적 없다는 답변만 들려왔다. 쿵쿵 쿵쿵-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지.
세상에, 난 죽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너무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200만 원짜리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속상함과 집에 가서 어떻게 얘기할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당장 다음 주 수업에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다는 아찔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한참을 망설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겨우 집으로 들어갔다.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한 단어씩 밖으로 내보냈다. 고개는 푹 숙이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전하는데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고작 신발 구경을 하다 카메라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바보 같았고, 카메라가 필요한데 다시 사달라고 하기엔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괜찮아. 바람 쐬러 가자.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나를 보며 아빠는 바람 쐬러 나가자고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 그만 속상해하고 기분 전환 하자며 데려간 곳은 목포였다. 목포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훌쩍이다가 위로의 말들에 웃다가, 다시 또 자책하며 훌쩍이다 보니 눈 앞에 바다가 있었다. 탁 트인 풍경을 보자 꽉 막힌 마음이 조금은 풀렸고 맛있는 저녁 식사 앞에서 스르르 녹아버렸다. 아빠와 엄마는 그렇게 내 기분을 풀어줬다.
집으로 올라오는 차 안. 한참 자기중심적인 나이의 나는 머뭇머뭇거리다 다음 주에 카메라가 필요하다고 얘기를 했고 아빠는 알겠다고만 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장에 입금했으니 원하는 카메라를 사라고 했다. 수업이 끝난 후, 폴짝거리며 카메라 매장으로 향했다. 일 년 사이에 성능이 부쩍 좋아진 것 같은 카메라를 손에 넣고 나니 그새 지난 일은 잊혔다. 참으로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이든 다 해주는 아빠가 당연했다. 어떤 부탁이든 척척 다 들어주고, 어떤 질문이든 척척 다 답해주는 척척박사. 아빠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때로부터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아빠가 남편이자 자식이고, 직장인이자 꿈 많은 한 사람임을 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나 어렸는데
지금의 나는 제법 커서 어른 같은 생각을 한다.
그때의 아빠는 그렇게나 컸는데
지금의 아빠는 더더욱 큰 사람이다.
아빠, 우리 바람 쐬러 갈까?
아빠와 함께하는 첫 여행지로 오카야마를 선택한 건 참 잘한 일이다.
추억을 간직한 채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에서 우리의 지난날과 오늘을 생각해본다.
아이와 어른이, 어른과 어른이 되어 함께 온 여행.
고즈넉한 거리를 걸으며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본다.
지난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