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음 해보는 일
고라쿠엔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오카야마 역으로 이동했다.
고라쿠엔 정문으로 나오니 버스정류장이 보였는데 마침 버스가 서 있길래 냉큼 올라탔다.
오카야마 역을 거쳐 우리가 향한 목적지는 '구라시키 미관지구'.
오카야마 역에서 구라시키 역까지 JR열차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1인 320엔)
수많은 열차들이 정차하는 역인 만큼 굉장히 복잡하다. 전광판에서 자기가 탈 열차와 플랫폼 숫자를 확인하고 이동해야 한다. (일본 열차 시간표를 확인할 때는 Japan Travel이라는 어플을 사용했다.)
잠시 집을 나간 것 같은 정신을 붙들어 매고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았다.
손에 따뜻한 컵을 쥐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 것도 잠시, 아까 소나기를 맞은 탓에 푹 가라앉은 앞머리가 걱정됐다. 가방을 뒤적거려 헤어롤을 찾았는데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방에 얼굴을 푹 묻은 채 찾아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들렸던 화장실에 놓고 온 것 같았다. 비상 상황이다. 이대로 돌아다닐 수는 없다. 다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에게 이 심각한 상황을 알렸다.
"아빠 아빠 내 헤어롤이 안 보여. 이거 사러 가야 해"
"그게 뭔데?"
"내 앞머리 마는 거"
"...?"
아마도 아빠는 그 물건이 왜 그리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편의점 3군데와 드럭스토어 2군데를 방문한 끝에 결국 헤어롤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행지에서는 무조건 직진하는 아빠가 나를 따라서 무려 다섯 군데의 상점을 들렸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그것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 군 말없이 따라왔던 아빠는 '이게 대체 뭐길래 그토록 열심히 찾니'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뽕을 되찾은 앞머리와 함께 내 자신감도 회복됐다.
구라시키 시는 오카야마 현에서 오카야마 시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미관지구는 에도 시대인 1600년대, 물자 수송의 중심지였다. 그로부터 약 400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상점들과 그 때나 지금이나 수로를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물 길을 걷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봄에는 벚꽃들이 만개하는데 그 모습은 가을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고 한다.
"여기 이름이 뭐라 그랬지? 자꾸 헷갈리네"
"아빠 이렇게 외워봐. 이 시키, 저 시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는 일본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오하라 미술관이 있다. 1930년 개관한 이 곳에서 고갱, 모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인 1,300엔) 오직 이 미술관을 보기 위해서 미관지구를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미술관보다는 길거리에 흥미가 많은 아빠를 따라가기로 했다.
수로를 따라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만큼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도 많고, 밥 집과 디저트 가게도 많다. 물론 카페를 사랑하는 나는 여기에서도 한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한 군데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는 자꾸만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걷다가 미관지구에서 유명한 (귀여운 얼굴 모양이 그려진) 푸딩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아빠는 다른 곳에도 있을 거라며 직진했다. 먹고 싶었는데 푸딩. 나는 푸딩 푸딩 하며 아빠를 쫓아갔다.
그래. 난 아까 헤어롤을 샀으니까 이해할 수 있어.
대신 우리는 파란색 찐빵과 핫바, 그리고 팥앙금이 들어간 빵을 사 먹었다. 커피는 길거리의 자판기 커피로 대신했다. 원하는 것이 100%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맞춰갔다.
(다음날 아침에는 아빠가 먼저 커피를 찾아서 사줬다. 그것도 핸드드립 커피를!! 행복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선정된 오카야마 1위 맛집. 데판쿠야(TEPPAN KU YA)
현지인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 주말에는 full-booking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영업시간은 18:00시부터 자정까지. 일요일은 휴무다.) 우리가 간 날도 모든 예약이 다 차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에서 어플로 예약을 하고 갔는데 그런 스스로가 무척이나 기특한 날이었다.
(Tripla라는 어플로 예약했다. 실시간으로 상담원이 예약을 도와준다. 3~4일 소요된다고 하지만, 일정이 급하다고 했더니 2일 만에 예약이 완료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심지어 무료다. 일본에 가고 싶은 식당이 있다면 이 어플로 예약하기를 추천)
이건 내가 쏠게
코스 메뉴 2개와 사케 한 병을 시켰다.
애피타이저-샐러드-해산물 구이-고기(소/돼지 중 택 1)-타코야끼-디저트(케이크/아이스크림 중 택 1) 순으로 음식이 나왔다. 저녁 7시 30분에 들어갔는데 식사를 마칠 무렵의 시간은 9시였다. 다 먹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아빠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가족 식사를 제외하고 단 둘이 밖에서 밥을 먹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번이 아빠에게 사 드린 첫 번째 식사라는 뜻이다. 그렇구나. 아빠도 의아하고. 나도 놀라운 그런 일.
야채를 그렇게 많이 먹는 아빠 모습은 처음 봤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의식적으로 야채를 많이 먹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여행 가방에는 건강식품과 약이 들어있었다. 여행지를 다닐 때에도, 메뉴판을 볼 때도 가까이 있는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지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 있는 글자는 독수리처럼 잘 보면서. 찌푸린 그 표정을 보는 게 나는 서글펐다.
하긴 그랬다. 핸드폰으로 이모티콘을 보냈는데 아빠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 이모티콘을 이해 못한 줄 알고 센스가 없다며 놀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는 걸. 내가 보낸 이모티콘을 한참 동안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젊은 직원에게 물어봤다는 걸. 코끝이 찡해졌다.
아빠가 나이 든다는 건 의식해보지 않은 일이다.
아빠는 언제나 내 슈퍼맨인데. 내가 20대 중반이 된 만큼 아빠도 함께 나이 든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 흐름에 따른 당연한 변화지만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받아들여야 하겠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언젠가 이 순간을 추억하며 이 곳에 다시 오고 싶어 할 거라는 것도 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은 지금에 집중하면 된다. 잠시 서글퍼진 마음을 곱게 접고, 부른 배를 팡팡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랑 같이 와줘서 고마워"
"아빠도 고~마~워~"
아빠와 함께 여행하는 이 순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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