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조건 좋을 거야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창문으로 바깥 날씨를 확인했다. 조금은 흐린 것 같기도, 하지만 맑은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날씨. 오늘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빠한테 말을 걸었다.
"아빠 오늘 날씨가 좋을까? 좋았으면 좋겠는데"
"오늘? 무조건 좋지~"
"어떻게 알아? 오늘 햇빛이 좋은가?"
"아빠랑 딸이랑 둘이 여행을 왔는데
어떻게 날씨가 안 좋을 수가 있어?
무조건 좋을 거야"
그러게.
아빠랑 나랑 처음으로 같이 여행을 왔는데, 날씨가 흐리면 어떻고 비가 내리면 어떻고, 또 해가 쨍쨍 이면 어떻단 말인가?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무조건 좋을 거라는 말. 그래. 참 맞는 말이다.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가 생각나면서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은 날들이었다."
하늘이 아주 맑았다. 조금은 쌀쌀한 아침 공기였지만 그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오늘 아침을 먹을 장소는 '교바시 아침 시장'
현지인들에게는 '아사이치'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시장은 한 달에 딱 한 번,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만 열린다.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만 운영되는데 각종 먹거리들이 가득해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오카야마 역에서 전차를 타고 사이다이지초 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곳으로 따라 가면 아침 시장이 나온다.
아빠는 시장을 좋아한다. 어느 장소로 여행을 가든 꼭 시장을 들리는 편이다. 특히나 현지인들이 방문하는 시장을 구경하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밥 한 그릇 먹는 것을 좋아한다. 오카야마에 관한 정보를 이리저리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교바시 아침 시장. 북적거리는 소리와 가까워질수록 아빠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우리는 오전 8시쯤 시장에 도착했다. 거리의 양방향은 모두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오카야마 사람들이 모이기엔 충분했다. 커피, 스콘, 쿠키부터 라면, 소바, 꼬치, 볶음밥, 도시락 등 각종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간이 식탁에서 따뜻한 소바 한 그릇을 먹었다. 유부로 순두부를 감싼 고명이 독특했다.
한참을 구경하다 줄이 길게 늘어진 한 천막을 발견했다. 닭꼬치를 파는 곳이었다.
대체 무슨 맛이길래 줄이 이토록 긴 것일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줄을 섰다. 그래도 10분이면 줄어들겠지 싶었는데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그 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닭꼬치를 기다리는 사이 어디에선가 감주와 라면을 사 온 아빠와 강가에 앉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이 눈부셨다. 감주로 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닭꼬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게 뭐라고- 싶은 첫 느낌과는 달리 먹으면 먹을수록 군침이 돌았다. 닭살은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데 껍질이 어찌나 쫄깃쫄깃 한지. 불향이 그대로 느껴지는 맛이라 더 좋았다. 좋은 술안주였다.
저마다 손에 먹거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반짝거리는 강물,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숯불 냄새,
피어오르는 연기,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오늘은 무조건 좋을 거라던 아빠의 말처럼
정말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좋았다.
아침 시장 구경을 마치고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트램이 먼저 오길래 냉큼 올라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가 예뻤다. 택시를 제외한 시내 교통수단을 다 타본 것 같아서 뿌듯했다.
오카야마에서 가까운 곳에는 세토우치 예술제가 열리는 섬들이 있다. 관광지로 가장 유명한 섬은 쿠시마 야오이의 호박이 전시되어 있는 나오시마 섬. 그 외에도 데시마 섬과 이누지마 섬이 유명한 편이다. 섬 모두 오카야마 역에서 우노 역으로 JR열차를 타고 이동한 뒤,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있는 우노항에서 배를 탑승할 수 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 페리 시간, 섬에 있는 작품 등의 정보는 다음의 홈페이지 참고 http://setouchi-artfest.jp/ko/)
오카야마에서 우노 역까지 직통열차가 자주 없는 편이라 자야마치 역에서 환승을 했다. 마찬가지로 표를 끊은 뒤 전광판에서 열차 정보와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면 된다. (오카야마 역부터 우노 역, JR열차 1인 580엔) 시간은 약 50분 정도 소요된다.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이었지만 간간이 캐리어를 들고 타는 유럽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데시마 섬.
미술관도 미술관이지만 주변 경관으로도 유명한 장소다. 계단식 논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이는 길. 이 곳을 자전거로 달리면 얼마나 속이 뻥- 뚫릴까, 기대됐다.
9시 41분 오카야마 역에서 출발해 자야마치 역에서 환승, 우노 역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7분이었다. 우리가 탈 페리 시간은 11시 35분. 시간이 여유로웠기에 천천히 걸으며 우노항으로 걸어갔다. (우노 항-이에우라 항, 페리 1인 770엔) 순조롭게 페리 표를 끊고 우노항 주변 구경을 시작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까먹을 도시락과 맥주도 구입했다. 골목골목 구경을 마치고 11시 10분쯤 승선장으로 들어왔는데, 맙소사. 분명 아까 있던 배가 사라져 있었다. 설마 아직 25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출발했을까 하며 매표소 직원에게 표를 보여줬더니 허둥지둥한다. 배가 이미 출발한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다음 배는 2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직원은 황급히 표를 돈으로 바꿔주고서는 200m 떨어져 있는 소형보트 탑승장으로 가라고 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라는 말과 함께. 혹시나 배를 놓칠까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뛰었다. 다행히 표를 살 수 있었다. 우리가 탈 배는 아까 본 페리의 1/3 정도 되는 규모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아빠도, 나도 지쳐버렸다. 여유롭게 구경하던 우리 모습과 허둥대는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어찌나 웃기던지. 어찌 됐든 배를 타서 다행이었다.
보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결국은 이런 상황도 다 추억이 되리라. 우리는 그렇게 이에우라 항으로 출발했다.
어찌 됐든 오늘은
무조건 좋은 날이니까
지난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