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융 Nov 14. 2017

오카야마 부녀(父女) 여행 #6

#6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또다시, 우연

그토록 기대하던 풍경을 만나 한참을 뛰어다녔더니 제법 더웠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가라토 항'을 지나 '심장소리의 아카이브'로 향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내리막길이었다. 우리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쌩쌩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았다.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발로 힘차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빠가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자전거 빌려주나 봐."

"어디?"


어디로 갈까


거짓말처럼 가라토 항 근처에서 자전거 렌탈 가게를 발견했다. 이에우라 항에 비해 이용객이 많지 않아서 자전거가 남아있던 것 같았다. 게다가 1시간에 100엔이라는 착한 가격! 배 출발시간을 고려해도 1시간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전거 두 대를 빌렸다.

(혹시 이에우라 항에서 자전거를 빌리지 못했다면 가라토 항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가라토 항에서 빌린 자전거는 이에우라 항에서 반납 가능하다. 물론 약간의 추가 금액이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자전거보다 바퀴가 얇아서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한동안 비틀거려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려줬다. 이야호 -!



낯섦, 익숙함

데시마 섬에는 데시마 미술관을 포함해 17개의 작품이 있다. 일정 상 우리가 들릴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또 우연히 알게 됐다. '심장소리의 아카이브'.

문득문득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요즘, 어쩐지 들리고 싶은 장소였다.

심장소리의 아카이브라니. 이 무슨 생소한 장소란 말인가.


프랑스 예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심장소리를 모아놓은 곳이라 했다.

가라토 항에서 자전거를 타고 10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구불구불한 숲 길을 통과하면 바닷가 끝자락에 위치한 아카이브가 나온다. 굉장히 고요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내는 발자국 소리가 전부였다. 어쩐지 발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걸어야 할 것 같은 곳이었다.


심장소리의 아카이브

 

들어가지 않겠다는 아빠를 데리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매표소가 보이는데 병원에서 볼 법한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이 표를 끊어준다. (1인 510엔, 심장소리 녹음 시 1,540엔) 생각보다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매표소 왼쪽에 위치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걸이 TV가 있는데, 여기에는 지금 재생되는 심장소리의 정보가 표시된다. 심장소리의 주인을 알려주는 셈이다. 생소한 느낌을 안고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무엇이 펼쳐질지 몰랐기 때문에 문을 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출처 : 세토우치 예술제 공식 홈페이지)


문을 열자 암실처럼 깜깜한 공간이 펼쳐졌고, 온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아주 낯선 공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심장 소리에 맞춰 가운데에 설치된 조명이 커졌다 꺼졌다 했다. 무서웠다. 이런 걸 기대하고 갔던 건 아닌데.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빠도 보이지 않았다. 감으로 옆에 있는 아빠 팔을 꼭 붙들었다. 세상에. 혼자 들어갔으면 5초 만에 줄행랑 칠 뻔했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걸어갔다. 불빛과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잔뜩 긴장한 내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아빠 팔에 의지해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드디어 이 공간의 끝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더듬어보니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출구는 따로 없었다. 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니. 길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거리였지만 깜깜한 어둠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얼른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아빠는 문을 향해 나가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선 채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조명을, 조명이 켜지는 찰나의 순간마다 비치는 벽의 모습을, 조명 뒤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출입구를 천천히 응시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순간에 나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같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일 분 정도 서 있었을까. 우리는 다시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빛이 보였다.

온 고막을 채우던 소리가 사라졌다.

익숙하지 않은 내 심장소리가 들렸다.


심장소리의 아카이브
너무나도 고요하던 곳.


소중함의 역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존재인데, 나는 내 심장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것.

늘 그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렇기에 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소중한 존재일수록 더 신경을 써야 하지만, 소중하고 익숙하기에 더 소홀해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낯설게 보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갑작스럽게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대가 아님을 깨닫게 됐다.

내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구나.

이 순간의 행복. 이 순간의 분위기. 이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 이 관계들은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들은 분명 변하리라.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정말 그렇다. 맞는 말이다.



걱정 마, 길은 다 이어져

감상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동네 탐방을 나섰다. 마을 사이 사잇길을 다니며 삶의 모습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빠는 얼마 만에 타는 자전거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자전거 타던 실력은 하나도 녹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또 처음이다. 자전거 타는 아빠를 보는 건. 쌩쌩 달리는 그 모습이 참 해맑았다. 아빠는 앞장서서 달려갔다. 천천히 뒤따라가던 나는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이는 길에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길이 없는 것 같은데?"


그새 저만큼 멀어진 아빠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이고. 걱정하지 마. 길은 다 이어져.


반신반의하며 쫓아갔다. 비포장도로라 곳곳에 돌멩이가 있었고, 울퉁불퉁한 그 길에 엉덩이가 아파왔다. 그리고 정말, 아빠 말처럼 다시 마을 길로 들어섰다.

뒤따라 가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길이 없어봤자 돌아가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걸까 나는.

아빠는 늘 나에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라고.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인생 뭐 없다고. 그거면 된다고.

글쎄. 내 입장에서 아빠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으니까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왼쪽이 내가 탄 자전거. 오른쪽이 아빠가 탄 자전거.


돌아보면 지난 1년 동안 제법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은 해라고 할까.

그 순간에는 정말 다 그만두고 싶었는데, 어떻게 버티고 나니까 또 다른 감정을 배우게 됐다. 이게 해탈인가.


미웠던 사람이 괜찮아지기도 하고, 꼴도 보기 싫던 사람이 그럭저럭 볼만해지기도 한다.

좋았던 사람이 돌아서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이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이유가 뚜렷한 변화도 있지만,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기도 한다.


관계도, 사람도, 감정도. 영원한 건 없다.

영원히 좋은 것도, 영원히 나쁜 것도 없다. 그러니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

나는 나 답게, 내가 살고 싶은 모습대로 살면 된다.


링이 여러 개 달려 있는 농구대.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 각각의 룰로 즐기면 된다. 작품 이름은 '승자는 없다'



마지막 저녁

가라토 항에서 이에우라 항을 지나 우노 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오카야마 역까지 한 번에 가는 직통열차를 탈 수 있었다. 오카야마 역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오늘 저녁 식당은 아빠의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가기로 했다. 동쪽 출구로 나가 골목골목을 살펴보던 아빠는 한 가게를 가리켰다. 그래 오늘은 저기다.


그냥 끌려서 들어왔다기에는 굉장한 맛집 같았다. 사인이 벽 한쪽을 가득 채웠다. 사장님은 캡틴이라는 명찰을 목에 붙이고 계셨다. 손님이 주고 간 선물이라고 했다. 오후 7시 전까지가 술을 50% 할인해주는 해피아워라며, 음식은 나중에 고르고 술 먼저 시키라고 권했다. 생맥주 한 잔과 맥주 한 병, 사케 한 병을 시켰다.


일본 영화 속 한 장면 같던 곳.
귀여우신 사장님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삼삼오오 모여 술을 기울이는 분위기였다. 음식을 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의 공연이 시작됐다. 흥겨운 기타 소리와 함께 우리의 흥도 한껏 올랐다. 다 같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빠와 함께 찾은 오카야마. 일본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찾아보니 이 식당의 이름은 'Time Trip'이었다. 시간 여행이라. 식당 이름마저 마지막 저녁식사 장소로 딱 알맞았다.)



지난 글 보기

#1 프롤로그

#2 어른 두 명

#3 처음 해보는 일

#4 무조건 좋을 거야

#5 뜻밖의 행운


매거진의 이전글 오카야마 부녀(父女) 여행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