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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May 04. 2024

크로이처 소나타

문학, 음악 그리고 그림

    왜 크로이처소나타인가? 톨스토이 당신, 설마 음악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던 건 아니었나요? 그게 아니고서야 제목을 저렇게 버젓이 똑같이 지어놓은 다른 이유는 당신이 그 뒤에 숨으려는 속셈이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는 속셈. 음악에는 죄가 없습니다. 여자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지독한 의심을 품고 있던데, 당신, 어떻게 일상생활 가능하세요? 그만합시다. 나는 이쯤에서 희생양 찾기 놀이는 그만하고 책을 덮으며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이만 잊겠습니다.  


.........


    하... 제기랄. 톨스토이의 강렬하면서도 난잡한 텍스트가 잊히지 않는다. 소설은 그렇게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소나타] 순수한 음악으로 즐기는데 방해가 되는 잡음을 만들어 낸 죄를 지었다. 소설을 읽고 유튜브를 통해 여러 연주를 연달아 들으면서 '피아노는 여성, 바이올린은 남성이 연주하면 그 구도가 유혹적일 것 같은데..'라는 음란한 생각이 얼핏 들어버린 것에 섬찟하며 놀란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한 남자의 열차 여행에서 시작된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귀족모임 대표까지 지낸 그의 이름은 뽀즈드느이셰프.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생각이었을 뿐,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들이 어딘가 있을 거라 생각을 스스럼없이 하며 '다른 친구들도 그랬던 것처럼'이라는 말로 본질을 흐리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미리 얘기한다면 그저 그런 방탕한 한 남자이고 때로는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는 호색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설은 그가 열차 안에서 만난 '나'와 다른 승객들에게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아내를 살해했던 끔찍한 사건을 들려준다. 살인의 계기에 음악의 연결고리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살인을 실행한 자는 화자 뽀즈드느이셰프 자신이다. 음악이 피고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살인자요 내가 저지른 살인, 그리고 그게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열차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는 설정 자체가 대단히 모순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살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는 여자에 대한 편력, 여자에 대한 성적 가치관, 부부 관계, 상류층 생활 등에 대한 그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하지만 부부 사이에서 입에 담지 못할 심한 말을 아내에게 퍼부으며 싸우고는 다시 저녁에 화해하고 서로를 탐닉하며 부부관계를 하고 다시 이튿날 원점으로 돌아가 싸우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이다. 그런 혼란스러움은 결코 그에게 신뢰를 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사실관계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p79) 저와 아내가 가진 서로에 대한 악의는 과연 어디서 생겨난 걸까 하고 말이죠. 그런데 모든 게 명확해지는 겁니다. 그 악의는 다름 아닌, 인간의 본성이 아내를 억누르고 있었던 동물적 본능에 저항하면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 (p145) 그날 아침 화해를 한 후 전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뜨루하쳅스끼가 아내와 가까운 사이로 보여 그자를 질투했었다고 말이죠. 그러자 아내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겁니다. 아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끌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정숙한 여자가 그런 사람한테 뭘 느낄 수 있겠어요? 음악이 주는 즐거움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당신이 바란다면 그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 


    안나카레니나 (1878)의 흡입력은 여인들의 한 남자를 향한 치밀한 묘사, 애써 가리키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묘한 동작 하나하나가 그를 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의 웅장한 섬세함에 있었다. 아내는 웃었다. '웃음' 바로 이 단어 하나에서 한 남자에게 마음이 열려있다는 암시는 주는 날카로운 감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음악도 아름답지만 연주를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춰가는 작업은 더욱더 두 사람의 관계를 내면 깊이 숨기기 좋은 구실을 만들어 준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둘을 바라보는 남편의 신경은 더욱더 곤두세워지고 아슬아슬한 서로의 줄타기가 이어진다.


    바이올리니스트 뜨루하쳅스끼에 대한 냉소적이며 지독히 경계적인 반응은 그의 아내와의 연결고리가 된 음악관에 대해 맹렬히 비난조로 토해낸다. 그리고 크로이처 소나타를 범죄 유발자로 몰아간다. 아내와 그의 불륜을 강하게 암시하는 원인 제공자로 음악을 낙인찍은 것이다. 아! 정말 끔찍한 소나타입니다.... 음악이 뭘 만들어 낼 수 있죠? 음악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걸 만들어 내려는 거죠?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저 흥분만 돋울 뿐이죠. 음악은 저 자신을, 제가 처한 현실 상태를 망각하게 합니다. (당신은 유부녀라는 현실?) 음악을 들으면 평소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와의 성적관계?)... 그런데 흥분감만 돋울 뿐, 그 흥분 상태에서 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가끔은 그렇게 끔찍하고 무서운 작용을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사랑을 쫓아가는 용기?)


   ... 크로이처 소나타만 봐도, 그 곡의 도입부에 나오는 프레스토 부분만 봐도 그렇습니다. 과연 그 프레스토를 응접실에서 가슴을 훤씨 드러낸 여자들 앞에서 연주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걸까요?... 이런 곡은 뭔가 특별한, 그리고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상황에서만 연주되어야 하는 곡입니다. 뭔가 특별하고 이 곡과 어울리는 중요한 행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연주해야 하는 곡입니다. 다시 말해 연주가 끝나면 그 곡이 자아낸 분위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가 생각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흥분에서 이어지는 성관계로 해석했다면 난 음란한 사람인가? 음악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행동을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살인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결코 과장이 아닐 듯하다....


    그자와 아내 사이의 관계는 음악이 이어 주고 있었죠. 가장 우아한 형태의 성적 욕망이 둘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 무엇이 그자를 자제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전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저 동물이라는 것밖에는요. 동물은 그 무엇으로도 자제시킬 수도 없고 자제시켜서도 안 되는 존재죠. p157


크로이처 소나타. 1901년, 르네 프리네. 노골적인 불륜을 보여주지만 톨스토이는 결코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결국 살인은 뽀즈드느이셰프 자신이 멀리 출장을 간 사이 둘의 만남이 있을 거라는 예감에서 시작되었고 그 의심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하루 일찍 몰래 돌아온 날 아니나 다를까 그 둘이 저녁식사를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만다. 아내는 뜨루하쳅스끼가 집에 올 일은 없을 거라 약속을 해 둔 터였기에 더욱 변명할 여지는 없는 상황이었고 변명조차 들어볼 틈을 주지 않고 남편은 그가 쥐고 있던 칼을 곧장 아내의 옆구리로 밀어 넣고 만다.


    정말 오해였을 수도 있다. 화가 르네 프리네는 1901년 유화작품에서 같은 이름으로 작품을 그렸지만 톨스토이의 텍스트에는 그와 비슷한 어떤 묘사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불륜'이라는 이미지가 필요할 때 떠오를 대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람들의 이 소설에 대한 이미지는 성에 집착하는 미치광이 남편으로부터 몸부림치는 한 불행한 여인의 진정한 사랑 찾기라고 포장될 수도 있었겠지만 톨스토이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 달랐다. 내가 지금 같은 소설을 읽고 있었나 싶을 만큼 정말 달랐다. 도대체 그가 주장하는 바를 소설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혼란스럽고 당혹스럽지만 그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감사하게도)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밝히고 있다.


    (1) 성관계가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건 거짓이다. 성관계를 위해 여성들이 희생되고 있다. (이건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로 밖에 볼 수 없는데... 지금 2024년의 시점과 톨스토이의 1800년 후반의 시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관계의 결과인 출산 문제와 그 결과의 무게를 온전히 여자에게 지우는 건 범죄요 비겁한 행위이다. (2) 연애를 건강의 필수조건 내지는 쾌락으로 여기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위태로운 부부관계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여론이 이를 비난하도록 가르침을 줘야 한다. (3) 위 두 가지 이유로 고귀한 출산의 의미가 퇴색돼버렸다.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한 피임은 육체적 사랑을 속죄할 수 있는 아이에 대한 염려와 노고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양심에 반하는 살인행위와 흡사하다. 금욕적인 삶이 결혼 생활에서는 더더욱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4) 인간의 아이를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발현되는) 짐승의 새끼처럼 키우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 (5) 육체적 사랑이 특별히 칭송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니 젊은이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에너지를 인류나 조국, 고학, 예술 등 봉사하는데 써야 한다.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단 말이다.


연주를 하는 내내 두 눈은 눈부시게 빛났고 얼굴에는 비장함과 의미심장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p153


    에필로그에서 하려던 얘기를 좀 더 명확히 이해했을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소설 속에서 그의 메시지를 찾기 어려웠다는 점은 참 불편한 상황이다. 따로 에필로그가 있어야 메시지를 알 수 있다면 소설의 의미가 무엇일까? 소설을 이리도 심각하게 읽어야 했더라면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을 듯하다. 결코 가볍게 읽어도 되는 소설이 아니라는 점에 피곤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백번 양보하여 예술은 원래 피곤하고 즐기고 싶다면 놀이공원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톨스토이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을 전해주고 싶다. 여전히 그가 강조하는 주제와 크로이처 소나타를 끌고 온 배경은 찾을 수 없으니 베토벤의 명작이 희생양이라는 추정에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톨스토이가 베토벤 음악을 특히 좋아했을지라도 말이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가장조, Op.47,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이 1802~1084년에 작곡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를 기리기 위해 작곡되어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크로이처는 이 곡을 이해할 수 없다며 평생 연주를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원래 다른 사람에게 줄 곡이었으니 자신을 위한 헌정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였다면 조금 이해할 수는 있겠다.


사실, 난 바이올린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바이올린보다 피아노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바이올린이 없이 피아노 솔로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될 만큼이다. 1악장 서정적이면서도 때로는 프레스토답게 빠르면서 끌어당기는 긴장감 그리고 바이올린과 주고받는 부분에서의 따뜻한 감성도 느껴본다.


누군가와 협주를 한다면 정말 그에게 빠질지도 몰라


*녹색 텍스트는 크로이처 소나타 (뿌쉬낀하우스, 김경준 옮김)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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