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의 노동자
피아노라는 악기는 대중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철학자의 아우라에 피아노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부만 열심히 한 친구에서 피아노라는 평범하지 않은 취미는 범상치 않은 강력한 이미지 메이킹 효과를 주는 게 틀림없다. 피아노를 좋아하기에 이러한 주제가 눈에 뜨이긴 한 것인데 음악에 그다지 취미 없는 객관적인 시각에서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다. 사르트르도 그렇고 니체도 마찬가지다. 한때 구토를 읽고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매력을 느꼈던 시절도 있었다. 니체는 더더욱 모른다. 고작 자라투스트라 책 좀 읽었다고 감히 그의 사상을 이해한다고 하는 건 코끼리 다리 만지기도 아니고 코끼리 발자국만 보고 있는 격이다. 신은 죽었다고, 기존 관념을 망치로 깨부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외치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고 공감되는 부분이었지만 넘치는 은유에 헤어나질 못하고 다시는 이런 서사시를 읽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뒤돌아서 남은 건 난해함일 뿐이다. 이제부터 철학자 니체는 잊어버리고 피아니스트 니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홀가분할 것 같다.
p45. 사르트르는 음악을 사랑하는 친척들에 둘러싸에 유년기를 보냈다.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악기를 다룰 만큼 음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프롤로그 10p. 사르트르는 악보를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 음표 하나하나 공들여 치지도 않는다. 음표들을 은근슬쩍 건너뛰기도 하고, 뻣뻣한 자세로 수줍은 듯 연주한다. 아니, 연주하지 않음으로써 연주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런 연주 스타일은 그가 말했던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 자체이며, 시간성과 육체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랬다! 나도 사르트르적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도 나에게 이런 평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피아노를 좋아하고 실존주의적 지적 담론과 농담을 즐겨하는 평범한 가장이고 직장인일 뿐이니까.
p82 니체는 아홉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히 바흐와 헨델,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좋아했다고 한다.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고 2년 만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오르간 음악과 합창곡을 들으며 컸지만 네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읜 뒤로는 어머니와 여동생에 둘러싸여 피아노를 쳤다. 훗날 니체는 아버지에 관한 꿈을 꿀 때마다 아버지는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교회 안에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철학 얘기를 하고자 하는 책은 아니니 니체에 대한 서술은 피아니스트 니체에 집중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면 철학자 니체로만으로도 그의 사상을 쫓아가기에 충분히 벅찰 수 있겠지만 이미 그는 70곡이 넘는 작품 -가곡, 교향곡, 합창곡, 피아노곡 - 을 작곡한 엄연한 음악가 니체이다. 말을 하기 어려워하고 분별력을 잃어가던 노년기에도 피아노 연주만큼은 더 열정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가 실은 피아니스트를 꿈꿨고 철학가와 음악가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본인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을 거라 짐작되는 부분이다.
114p 망치를 든 철학자를 자처한 니체는 타락한 현대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기존의 우상들을 하나둘씩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이 우상 파괴가 새 시대의 종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p135. 음악은 니체에게 가치 평가를 위한 시간과 척도, 즉 규칙의 목록과 공평판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세계를 청각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 20세기 여러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각에 매몰된 철학을 뛰어넘기 위해 니체는 소리굽쇠를 들고 자신의 피아노 소리를 기준음 삼아 다양한 사유 체계와 작가들, 문화에 귀 기울였다. 우상을 부수기 위해 들었던 망치가 원래는 피아노의 현을 두드리는 해머가 아니었을까?
p134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작곡가로서의 성공이 좌절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철학이나 시보다는 음악에서 찾았으며, 한순간도 음악가로서의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야망을 분출시켰고 바흐부터 비제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음악가들과 대화했다. 슈만과 쇼팽, 바그너를 넘나들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즉흥연주하고 작곡했던 곳도, 아름다운 가사에 어울릴 멜로디를 떠올리던 곳도 피아노 건반 위였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지독한 고독으로 자신을 내몰았을 때 역시 니체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심지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한 뒤에도 친구 페터 가스트에게 자신은 무엇보다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모두 당대의 가장 현대적인 음악을 논했지만 정작 이들이 사랑했던 음악은 피아노가 악기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이었다. 그들이 기득권에 저항하고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부르주아의 전형이라 여긴 음악회장을 멀리했고 음악 담론을 나누며 사교활동으로서 교양인들과 섞이길 거부하였다. 음악을 사교의 도구로 활용했다면 그 음악의 순수성에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교가 끼어들 틈이 없이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날릴 충분한 사상적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본 업에 충실했다는 얘기다. 음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그들의 행동이 머리에서는 비평을, 가슴에서는 동경을 느낀다는 점에서 괴리감이 들 수 있다. 순간 이런 차이에서 당신들은 철학자이니 뭔가 남다른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실소 짓게 만든다. 그들을 그냥 음악을 좋아한 평범한 시민, 것 멋이 들었든 어쨌든 음악가를 꿈꾸었던 한 사람으로 봐야 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이런 비평을 하는 순간만큼은 철학도 감히 음악의 순수함을 건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https://youtu.be/r_xIvlUYyPc?si=WMfOsRFvbtYSyU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