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뉘앙스의 문제
상대방: "이거, 시상식에 쓸 건데 대본이 아니라 뭐라 하죠?”
(나, 당황스럽게 눈을 깜박인다.)
(상대방,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대본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색하잖아요, 그쵸?"
(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말한다.)
나: "저 한국어 잘 못해요."
(나,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늘 일어난 일이다. 이번 학기에 수강신청한 영화 만들기 교양 수업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조별 과제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팀원을 찾던 중 일어났다.
모두가 각자 펭귄처럼 무리로 스르륵 사라지고 나 혼자만 헛웃음을 짓고 있던 교실 안. 나는 팀원이 없어서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그 마법의 말.
한국인이세요?
해외에서 이 말을 들으면 정말 마법의 말 같다. 갑자기 얼굴이 확 피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난 홍콩에 처음 와서 격리 호텔에서 봤던 커리어우먼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건 다른 이야기이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뽕실뽕실한 앞머리를 한, 내 중학교 같은 반 학우를 닮은 한 여자 분이셨다. 그 분은 나를 보더니 같이 팀을 하자고 했다. 일단 나는 마냥 반갑게 말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면 이 교실에서 한국어를 썼다가는.
썼다가는.
1. 눈에 너무 띄고.
2. 다른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이 2번 문제로 내가 홍콩과 중국 시안에서 많이 소외감을 겪었기 때문에, 역지사지로 나는 한국어로만 소통하는 걸 피한다. 공용어인 영어를 써서 모두가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고 그렇게 우리는 다른 두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순항하듯 그룹을 만들었는데. 사건은 여기서 발생한다.
그녀는 홍콩인이고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이건 전혀 사건이 아니고.
그런 그녀가 영화 전공이고 현재 회사 인턴을 하고 있다. 이것도 전혀 사건이 아니지만.
그런 그녀가 홍콩국제영화제를 위해 일하고 있고 대본을 쓴다면 이건 조금 많이 큰 사건이다.
아니 일단 나에게는 말이다. 나같은 학생에게는 갑자기 그녀가 "지창욱, 임시완, 헤어질 결심." 이라는 키워드를 말하며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영화제 일을 해도 되는 걸까...?" 하며 한숨을 쉬면.
난 눈이 커다래져서 입만 어버버거릴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녀가 영화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도 정말 컴퓨터에 불이 나도록 한국어 카톡이, 문자들이, "어디 사모님." "어디 이사님" 이렇게 번듯한 회사명의에, 수많은 회사문서들, 화룡점정으로 시상식 대본 파일을 딱 켰을 때 정말정말
저 사람은 도대체 뭘까?
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녀를 흘깃거렸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듣고 그녀가 뜻밖에 날 보며 길게 한탄을 했다. 심지어 어떤 워드 파일을 가리키며 말이다. 본론은 앞에서 말했던 일화와 같다. 원어민인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지.
용감하게도 한국어 못한다는 말은 했다.
나도 모르겠단 말이다. 그 애매한 뉘앙스 차이. 너무 어렵다. 그러다가 두번째 강의를 듣던 차에 번득 생각났다.
아니, 그 뉘앙스 말이야.
이거 이번에 처음 생각하는 게 아닌데?
아뿔싸.
이거 나 영어할 때도 생각했던 거잖아.
때는 한참 내가 영어에 비관적이던 때다. 난 아무리 영어를 공부해도 “외국인”이 말하는 것 같을 것이라며 고래고래 반항아처럼 소리쳤다. 물론 내적 소리침이었다. 나는 생각이 시끄러운 편이니 이것도 내겐 꽤나 큰 사건이었다.
영어에서도 그 뉘앙스를 영영 모를 것이라 생각하니 (아니. 도 공부하면 알 수 있다. 근데 이때는 탓할 거리가 필요했었다.) 열의가 팍 식었었는데
모국어인 한국어도 뉘앙스를 모르잖아.
영어나 한국어나 둘 다…
모르잖아….?
그 순간 멍하니 유리창을 보다가 허탈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둘 다 못하면 자존심 부릴 것도 없고
뭐 잃을 것도 없겠다. 해외 취업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