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수안의 삶은 변화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는 수안이 변화를 싫어해서라기보단 어느 하나 강렬하게 싫어하지 않는 무던한 심성을 가진 탓이었다. 대체로 안주(安住)는 변화보다 적은 노력과 자원을 요구했기에, 특출나게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던 그녀는 자연스레 머무르는 것과의 동행을 택했다. 하지만 삶은 그녀를 언제까지고 안온함의 바다에 머무를 수 있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수류는 그녀를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수안은 지금 산티아고의 호텔에 있었다.
벌써 이국에서 맞이하는 스물한 번째 태양이지만, 아직도 수안은 자신을 에워싼 생경한 공기가 낯설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넓고 정갈하게 정리된 호텔방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잠시간의 내적 만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늘이 토요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걷고 기지개를 두어 번 켠 후 그녀는 식당으로 향했고, 언제나처럼 스크램블드 에그와 베이컨, 커피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식당 직원과 옅은 눈웃음과 고갯짓을 나눈 뒤 잠시 눈을 감고 수안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호텔 직원의 추천으로 그녀는 토요일 당일치기 투어를 예약했었지만, 출발 전날인 어제 여행사 사정으로 해당 스케줄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게 되었다. 중간에 낀 호텔 직원이 다른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정작 수안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출장 일정이 고단해서 반문할 의욕을 다소 잃기도 했거니와, 사실 꼭 그 장소가 아니더라도 큰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안의 몫까지 짊어진 듯 한껏 근심에 잠긴 직원은 일정이 변경되는 것이 정말로 괜찮은지 수 차례 수안에게 되물은 후에야 어느 정도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수안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갔었다. 이런 무던함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수안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휴식을 위해 마음을 쓰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커피를 마셨고, 식사를 마친 후 아까의 직원과 다시 눈을 마주친 후에 호텔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엔 그녀를 여행사 셔틀버스로 안내할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수안과 직원은 짧은 인사를 나눴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차량이 도착했고, 수안은 또 다른 직원에게 인계되었다. 마치 택배가 배송되는 것처럼, 수안은 차례로 호텔에서 여행사로 넘겨졌다. 작은 밴을 타고 이동한 곳에서 수안과 다른 일행들은 큰 버스로 옮겨 탔고, 본격적인 여정의 막이 올랐다. 불행 중 다행인지 가이드는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투어 내용을 설명해 주었고, 대략 어느 정도는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심지에서 출발한 차량은 어느샌가 흙과 돌,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무가 그리 크지 않은 탓에 땅의 색이 그대로 보이는 날것의 풍경은 초목으로 뒤덮인 한국의 풍경과는 달랐고, 이제껏 와보지 못한 곳에 첫 발을 내딛는다는 감정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급할 것도 없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한적한 여정길도 수안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했다. 매번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바삐 달려 나갔던 날들도 오늘만큼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쪽이 맞고 틀리냐는 질문은 무용하며, 다만 이따금 자신과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추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노라고 수안은 덜컹거리는 버스 창가에 앉아 생각했다.
목적지인 Portillo 호수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버스는 종종 가던 길을 멈추고 여행객들과 버스 자신에게 휴식을 선사했다. 어느 곳에 내리더라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되리라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수안은 버스 주변을 거닐었다. 산허리를 타고 이어지는 도로는 차량 한 두대 정도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도로엔 제법 많은 화물트럭들이 곡선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여러 물건들을 나르고 있었다. 이 길은 여행객들에겐 관광의 여정이었지만, 화물을 나르는 이들에겐 생을 이어나가기 위한 젖줄이자 외줄이었다. 실제로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도 버스와 트럭이 반대 방향에서 마주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곡예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휘감기려던 찰나에 수안은 절벽 밑에 흐르고 있는 계곡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곳엔 천혜의 대자연이 아닌, 언제 추락했는지도 모를 트럭의 뼈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미 수안을 포함한 여러 여행객들이 계곡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여행 가이드는 마치 여행의 코스인양 그 트럭을 가리키며 설명했지만, 그 또한 사고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운전기사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며, 차를 끌어올릴 이유도,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도 어느 하나 찾지 못했기에 트럭은 그 자리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안의 마음속엔 이런 실리적인 생각보다는, 생을 영위하기 위해 산허리를 누비던 야생동물이 발을 헛디뎌 계곡 밑으로 추락하여 남긴 유골이라는, 허황되지만 쓰린 망상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삶의 무게며 절박함이며 하는 이런저런 뒤숭숭한 심사를 껴안은 수안은 헛헛하게 남겨진 철골을 뒤로한 채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