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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Sep 18. 2024

무제 04 (1)

우리는 죽음을 향해 비가역적 순행을 하는 여행자다. 차치할 수 없는 진실을 목도했음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나는 자신의 여정길이 난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무의미한 발버둥이기보다는 후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이들의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기를 마음 깊이 소망한다.
2173.09.15
M.


1.

유압장치가 철문을 밀어내는 치찰음, 귀를 간질이는 유체 소리와 함께 M은 포트에서 깨어났다. 이런 이질적 소리를 제외하고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 심적으로는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지만, 그간에도 착실하고 무겁게 흐른 시간은 동시에 그의 마음을 지긋이 짓눌렀다.

"유난히 소행성이 많은 시기에 깨어나게 됐네요."

C가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난 M에게 인사 아닌 인사말을 건넸다. C의 말대로 창밖엔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한 돌덩이들이 시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게요. 우주에게 꽤나 분에 겨운 환대를 받는 기분인데, 그간 별다른 일은 없었겠죠?"

"네. 뭐 다 그럭저럭 한 일들만 있었죠. 유감스럽게도 특별한 사건은 없었어요, 일단은."


이런저런 대소사를 뭉뚱그려 말하는 듯한 어투의 C였지만 그녀만큼 일을 명료하게 해내는 사람도 드물었고, M이 C를 발탁하여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킨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다만, M은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C와 마주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리라고까지는 상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M의 머리 위를 스치는 시계는 지금이 2180년 3월 15일임을 후험적으로 그에게 인지시키고 있었다.


"제가 따로 챙겨야 할 일들이 있을까요?"

M은 C에게 물었다.

"지금 경로에 큰 특이사항은 없어서, 주기적으로 관측 기록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말 그대로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우주는 차분하고 공허했다. 이 순간 M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에 생명체라곤 M과 C 단 둘 뿐이었다. 미지의 외계를 향한 인류의 염원은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그 활로를 열었으나, 그 길이 아직까지 완전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기에 연구자들은 탐구심과 자신들의 여생을 놓고 불완전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미지와의 조우를 택한 5명의 연구자는 탐사선에 몸을 실었고, 2명씩 번갈아가며 깨어났다 동면을 취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그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자 분절된 미래와 멀어지는 과거를 감내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공(空)과 만(滿) 은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물감의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며, 이 세상 모든 것을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칠흑 같은 우주는 그 깊이만큼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미지의 요람이었다. 다만 그 요람에 너무도 긴 시간 동안 머무른 나에겐 이 공간이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침상이 되어버렸을 따름이다. 마지막 잎새는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붙들 것인가. 그것은 잎새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2175.05.04
M.


2.

탐사선 안에서의 생활이 육체적으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새로이 포트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시간을 뛰어넘어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지구로 송신할 보고자료 작성을 끝낸 M은 의자에 등을 누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C도 이제 막 할 일을 마친 차였다.

"이번 주간도 어찌어찌 끝났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C도 고생 많았어요. 이제 좀 쉬어요."

"그래야죠. 별달리 할 건 없겠지만."

멋쩍은 미소와 함께 C는 개인 공간으로 향했다. M은 바깥이 보이는 조종실에 남아 얼마간 우주를 눈에 담았다. 그런 후에 M도 자신의 포트가 있는 개인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빛바랜 노트 한 권과 볼펜이 놓여있었다.


우주에 대한 관측자료, 개인적 의견과 감상들을 적은 보고서는 전파에 실려 지구로 보내지며, 이따금은 지구에서 연구 자료에 대한 피드백이나 시시콜콜한 감상이 답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M도 이런 초장거리 펜팔이 싫진 않았지만, 외부의 간섭 없이 오롯한 자신만의 글공간 또한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펜과 노트를 택했다. 그 노트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기록물이자 글로 그려낸 M의 사고의 자화상이었다. 후일 인류 혹은 그 이상의 지성체가 이 글과 조우한다고 한들 그것은 M의 소관 밖의 일이었다. 얽매이지 않은 안온함으로 M의 노트는 조금씩 채워져 나갔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동경하던 때가 있었지만, 정작 내가 그 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아득히 먼 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겐 누군가의 동경이 와닿고 있을까? 과거의 내가 품었던 동경은 어디로 간 것일까? 동경은 동일시보다는 수렴의 대상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지금의 나는 별다른 해답도, 답을 찾을 방법도, 찾고자 하는 의지도 어느 하나 선명하게 쥐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지금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동경을 손에 쥐고 앞으로 약진하고 있을 뿐이다.
2176.01.05
M.


3.

먼저 조종실에 와있던 M이 C를 맞이했다. 오늘은 외부로 탐사체를 보내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날이다. 자동화된 프로세스에 연구자들의 역할이 크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K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탐사체가 전서구 같지 않냐는 얘기를 했어요. 새로운 소식을 좋든 싫든 착실히 가져다주니까요."

탐사체의 이동 경로를 바라보던 C가 M에게 말했다.

"우주의 비둘기는 지구 비둘기보다 꽤나 근사하네요. 그렇죠? K는 가끔 독특한 생각을 하네요."

"M도 그쪽으론 만만치 않은 거 알고 있죠?"

삼자대면이라곤 있을 수 없는 선내에선 이야기와 소식이 사람을 타고 흐른다. K와 마주치는 건 순서상 꽤 나중이 될 것이기에 M은 전서구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M의 머릿속을 맴돌던 와중 철로 빚어진 전서구는 탐사선으로 복귀했다. 탐사체는 미지의 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했고, 이는 미지에 대한 단초로 기능하며 우주에 대한 인류의 식견을 확장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이 M을 필두로 한 연구자들을 점차 옥죄어오고 있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유의미했지만 세상을 일순간 바꿀 정도로 막강하진 못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은 계획에 따라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의 여정은 곧 반환점을 맞이하여 이제는 아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을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영민한 연구자들은 야속하게도 이에 대해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고, 포트에서 깨어날 때마다 남은 날을 가늠하고 있었다. C와 M도 물론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오늘의 그들은 잠시나마 전서구와 푸른 하늘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란 하늘이나 바다 사진을 좀 가져올 걸 그랬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탐사를 준비할 때 기술적인 부분은 그렇게 꼼꼼히 챙겼으면서 정작 저희 생각은 깊게 해보지 못했네요."

우주에 눈을 고정한 채로 C와 M은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상자는 예로부터 미증유의 존재였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구멍이 뚫린 상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실험에 등장하는 상자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자극하며, 호기심과 상상력, 불확실성은 인류를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게 해주는 연료이자 부싯돌로써 기능하곤 한다. 우리 다섯 명의 탐사의 끝엔 어떤 상자가 놓여있을까?
2177.10.25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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