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렁 Oct 09. 2024

무제 01(2)

https://brunch.co.kr/@jooreong/171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하는 호사를 누리며 서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래라면 회사에 출근해야 했을 수요일이지만, 오늘은 마침 달력의 검은 글씨가 얼굴을 붉힌 공휴일이었 때문이다. 설익은 잠에서 깨어나 회사로 향하던 평일과는 달리 기분 좋게 영근 잠을 수확한 그는 느린 발걸음에 실려 주방으로 향했다. 찬장 앞에서 시 망설이던 서일은 이내 캡슐커피를 집어 들었고, 자신 안의 열을 올리던 커피머신은 이내 에스프레소를 잔에 토해냈다. 그는 커피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 이상의 노력을 들일 생각까진 없었다. 세상 만물에 애착을 갖기엔 손에 쥔 패가 충분치 않음을 그는 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카페인을 적당히 머금은 그에겐 뚜렷한 소임 없는 하루가 주어졌다. 오늘 하루는 밀린 집안일을 하고 침대와 소파 위를 유영하는 날이 될 수도 있었고, 이런저런 좋아하는 것들을 가방에 담아 소박한 나들이를 떠나는 날 또한 될 수 있었다. 약간은 서늘하고 차분해진 공기에 반가움을 느낀 서일은 카메라와 책, 접이식 의자 정도를 챙겨 문을 나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것에 공평하고 과분한 애정을 내비치던 태양은 이제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뒷짐을 진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에 탄 후에 서일은 눈을 감고 오늘에 대해 천천히 생각했다. 머릿속을 잠시 맴돌던 생각은 머지않아 한강에 가닿았다. 그는 시동을 켜고 한강으로 향했다.


여의도 공원으로 향하는 도로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기 마련이라 생각하며, 서일은 도로에 얼마간 머물러있었다. 출근길이라거나 약속이 있었다면 굳어버린 도로는 그를 짓눌렀겠지만, 휴일의 나들이는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적당한 장소에 주차한 후 서일은 강변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을에 이끌려 잔디밭 위를 메우고 있었지만, 한 사람 앉을자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늘과 강, 약간은 가을 빛깔이 감도는 나무들을 바라보던 서일은 이내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보이는 장소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았다.


사무실에 놓인 의자와 한강변의 의자는 개념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다른 해석을 낳는다. 기껏해야 수 미터 간격의 파티션과 벽에 갇힌 사무실의 의자와는 달리 강변에 놓인 의자는 어딘가에 얽매여있지 않다. 의자에 앉아 하늘과 구름, 강과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분에 겨운 자극이다.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의자 위에 앉은 서일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따금 명주실 같은 바람이 볼을 간질이기도 했고, 제각기 다른 형태의 구름들은 느리고 착실하게 경관을 바꾸어놓기도 했다. 기란 공기와 사람 모두에게 필요하다. 때마침 일주일의 중간에 맞이한 공휴일은 산들바람을 불어넣어 서일의 마음을 나부끼게 해 주었다. 시계를 보지 않은 채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 그 빛깔을 달리하고 그림자를 늘릴 즈음 서일은 환기를 훌륭하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제 0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