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가리키던 계절의 시위는 어느덧 뉘엿뉘엿 기울어 가을의 초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나절의 일광을 양껏 받은 초목은 녹색의 생을 외계로 발하고 있었고, 이 생의 파편은 우연찮게도 그 앞을 지나던 서일에게 가닿았다. 물을 먹은 솜처럼 찌뿌듯한, 여느 때 같던 출근길은 이 녹광을 마주치며 일순간 선연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이따금 선명해지는 일상을 바라보며 서일은 그 선명함이 아닌, 선명하지 못했던 다른 일상을 톺았다. 오늘의 오전이 빛난 것은 오전의 주광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를 제외한 나머지 순간이 생기를 잃었었기 때문인가에 대하여.
녹빛 잔향이 사그라들고 날 선 회색의 건물들에 침잠할 무렵 서일은 사무실에 도착했고, 으레 건네는 묵음의 목례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서일은 의자로 빨려 들어갔다. 책상엔 어제 마셨던 녹차 티백이 종이컵 안에서 생기를 잃고 바싹 말라있었다. 하기야 찻잎은 티백에 들어가기 위해 수확된 그 순간 생을 이미 빼앗겼다고 보는 게 맞지만, 마지막 여생의 잔해가 뜨거운 물에 우려 지고 나서 다다른 장소가 잿빛 빌딩숲 속 종이컵인 것은 퍽이나 음울할 일일 것이다. 닻을 잃은 부표처럼 정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유하던 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왔다.
"어제 그 자료는 대충 마무리가 됐을까요?"
"어느 정도 틀은 다 잡았고, 오전 중으로는 마무리가 될 것 같아서 되는대로 전달드릴게요."
"네 그 정도 일정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서일 씨"
간결한 대화를 나누고 건주는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같은 부서의 선임자인 건주는 바닷물에 잘 다듬어진 몽돌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어떤 풍파가 그를 깎아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서일에게 건주는 모난 곳 없이 무해한 사람이었다. 짤막한 세 줄의 대화 이후 서일은 다시 모니터와 키보드로 눈을 돌렸다. 활자와 그림, 표와 차트가 부유하며 서일을 한껏 어지럽히던 무렵, 한 줄기 광망(光芒)이 일순간 활자 사이를 갈랐다.
"모니터에 빠지겠어요."
사무실 복도를 지나던 소은이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서일의 옆을 지났다. 미색(米色)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커튼 뒤로 비치는 일광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서일은 잠시간 부유했다가 이내 침잠했다.
"... 모쪼록 이번 프로젝트가 일정 내에 잘 끝날 수 있도록 다들 파이팅 하시고, 오늘 회의 여기까지 하고 마무리하죠."
팀장님의 갈무리 후에 회의는 마무리되었고, 서일도 슬슬 귀가 준비를 시작했다. 부쩍 건망증이 잦아진 서일은 몇 번이고 주머니와 가방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어느 정도 마음과 타협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뉘엿뉘엿해진 해와 훈김이 서일을 맞이했다. 가을의 초입이라기엔 여름의 끝자락에 더 가까울 천기(天氣)는 아직 여름을 쉬이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빌딩으로 빚어진 숲을 거닐며 서일은 오늘의 저녁 메뉴를 생각했다. 집에는 즉석밥과 김치, 계란 정도가 있으니 적당히 한 끼니를 때울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배달을 시켜서 고기나 초밥을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사고(思考)를 이런 곳에 빼앗길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하던 서일의 발길은 어느새 집 문 앞에 다다랐다. 잠시간 멈춰있던 공간은 서일의 호흡과 함께 다시금 잔잔히 맥동하기 시작했고, 사랑해 마지않는 자신만의 오롯한 공간에 들어선 서일은 그제야 긴장의 장력을 느슨하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