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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Sep 02. 2024

무제 02

우리는 이따금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지 못한 것만을 동경하는 자의적 편협함에 매몰되곤 한다. 물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진일보를 꾀하는 건강한 편협함도 있을 것이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편은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작금의 본인이 가진 것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는 심연으로의 매몰에 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한 하늘은 한나의 편협이 어떤 류인지 감히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던 한나의 발길을 붙든 것은 문득 바라본 하늘 위에 걸려있던 사선(線)의 전깃줄이었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기울어가던 일광(日光)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따사로운 온기로 구름을 물들였고, 이 온기에 사로잡혀 지면에서 하늘을 향해 부유하던 한나의 시선은 때마침 그곳에 걸려있던 도시의 명줄에 가닿았다. 그 순간 고요하고 공허하던 한나의 머릿속엔 경종이 울렸고, 음표와 도돌이표, 쉼표와 셈여림표들이 제멋대로 떠올라 허공의 전깃줄 위에 걸리기 시작했다.


우레 같던 내면의 폭발 이후 부유하던 한나의 의식은 다시금 제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고, 그제야 한나는 두세 차례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겪으며 간신히 떼어냈다고 생각했던 음표가 이런 하잘것없는, 심지어 5선도 아닌 4선의 전깃줄을 보고 되살아나 비명을 지르다니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그야말로 우활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한나였지만, 그녀의 안에서 한 번 고동치기 시작한 감정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고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내면에서 울림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 유달리 고달픈 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30분 만에 끝냈을 일을 1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겨우 끝마칠 수 있었고, 이전에 제출했던 보고서는 반절 이상 다시 작성해야만 했다. 이렇게 실금이 나버린 한나의 심사(思)가 때마침 올려다본 하늘에 걸려 찢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녀도 본인 나름대로 오늘을 복기해 보았지만, 본인은 자기 자신의 완벽한 관찰자가 될 수 없기에 이 또한 쉽지 않았다. 허나 지금의 순간이 그녀 자신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을 변곡점이 되어버렸음을 한나는 좋든 싫든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동치는 내면을 부여잡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한나를 반긴 것은 적막과 고요였다. 약간 서늘한 공기와 어두운 조명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 거실을 빙빙 돌기도 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의자로 향하기를 수 차례 반복하며 집 안을 유영하던 한나는 저릿한 손을 붙들고 베란다에 있는 창고 앞에 섰다. 녹슨 경첩의 치찰음과 함께 열린 창고 안에는 한나의 과거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대충 되는대로 쑤셔 넣은 짐들 속에서 한나는 어제 넣은 것인 양 자연스레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만큼 곱게 마모되어 어느 면을 만지더라도 부드러웠는데, 마른침을 두 차례 삼킨 후 열어본 책에는 오선지와 음표, 그리고 그 위에 덕지덕지 쓰여있는 한나의 메모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간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나니 책 한편에서 피아노 소리가 이명(鳴)처럼 들려왔다.


수 시간 동안 요동치기만 했던 한나였지만, 그녀는 생각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쥐고 흔들 것 같던 떨림은 이제는 어느 정도 그 기세를 낮추고 차분하게 울리고 있었고, 이는 되레 한나에게 안정을 주었다. 그녀는 이제 와서 과거의 일들을 후회하고 책망하는 데에 감정을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만 한 번 울리기 시작한 그녀 안의 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인지하고 있었고, 한나는 이내 그 소리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냉장고에서 야채와 드레싱을 꺼내 담은 보울을 들고 한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수년 동안 컴퓨터 자판 위에서만 움직였던 손은 이내 건반과의 재회를 떠올리고 있었고, 중고 거래 사이트에 들어가 피아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계기가 사소하다고 하여 그 결과까지 사소해지는 것은 아니며, 작고 보잘것없는 불씨도 일순간 화마가 되어 모든 것을 휩쓸곤 한다. 노을 진 하늘에 걸려있던 악보는 아름다운 선율을 뽐내며 새로운 악장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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