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사무실엔 없고요. 요새 운동을 새로 시작했는데 그게 그나마 좀 재밌더라고요. 서일은 요즘 좀 어때요?"
"뭐 그럭저럭요. 사무실 얘기는 동감이에요. 퇴근하고 나서는 저도 운동 좀 하고 쉬는 게 거의 루틴이에요."
소은과 남우는 서일의 입사동기로, 이렇게 종종 휴게실에 모여 회포를 풀곤 한다. 비흡연자에겐 이런 티타임이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찰나였다.
"요즘은 새로 뭘 시작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핑계라면 핑계겠지만요."
티백을 우리며 소은이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도 새로운 걸 찾기보다는 전에 재밌게 봤던걸 다시 보게 되지 않아요? 실패하기도 이제 좀 귀찮은가 봐요."
"어, 맞아요. 정말 그렇네요."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듯 반사적으로 대답한 서일을 바라보며 소은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자리로 향하는 서로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삼인방은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자리에 앉은 서일은 커피를 마시기 전에작성하던 보고서와 재회했다. 머릿속의 생각과 의견을 글로 정갈하게 빚어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회사는 서일에게 가르쳤다. 같은 의미를 어떤 모양의 단어에 담느냐에 따라 그 문장의 방향성은 요동쳤고, 본인의 의지에 편향된 글은 겉보기에도 티가 났다. 논리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읍소가 요즘 서일의 업이었다.
"혼자 너무 머리 싸매지 말고 어느 정도 틀만 잡히면 파일 공유해 주세요."
서일의 몸짓에서 난색이 새어나갔는지 옆을 지나던 건주가 서일에게 말을 건넸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일단 되는 데까지 작성해서 공유드려볼게요. 감사합니다."
이웃사촌과 품앗이는 과거와는 다른 형태와 같은 의미를 가진 채로 사무실 책상 사이에 녹아들어 있었다. 기꺼이 자신의 손을 내어준 건주 덕택에 마음의 짐이 약간은 가벼워진 서일은 노트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다시 보고서에 빠져들어갔다.
체화된 습관의 생명력은 강하다. 회의 내용을 기록하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서일은 노트와 펜을 선호했는데, 여러 불편함을 차치할 정도로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컸기 때문이다.날것의 생각들이 종이 위에 정착하며 보이지 않던 갈피가 잡혀나가며, 무형의 씨앗들은 종이 위에 뿌리를 내리고 한 그루의 결론으로 자라난다. 돌과 파피루스의 후계자 자리를 꿰찬 종이는 디지털 시대 이전까진 독보적인 정보의 전달자로 군림해 왔으며, 디지털 태생의 현시대에도 아직 공고히 자신의 영역을 붙들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서일은 여러 이유로 e-book을 잠시간 사용했지만, 결국엔 다시 서점으로 향해 종이책을 구매하는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를 정리하다 자연스레 선회했던 서일의 사고들은 나름의 해찰을 마치고 다시 모니터와 노트 위로 돌아왔고, 퇴근을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서일의 문 앞 발치엔 손바닥 크기 정도의 택배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지난주 즈음 무심결 주문했던 음반이었다. 한번 고착된 호감은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지만 감정의 단초가 어디였는지는 종종 잊혀지곤 하는데, 서일이 구입한 음반이 딱 그러하였다.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던 무렵부터 '위로'라는 노래는 재생목록에 있었고, 노래방 18번 곡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몰아닥친 시간 동안 접하게 된 많은 노래들은 한 곡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희석시켰지만, 단 한 줌일지라도 이 노래는 마음 한편에 휩쓸려나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아련한 향에 이끌려 중고 사이트에서 이제는 십수 년도 더 된 음반을 구매하게 되었고, 이 소소한 일탈의 결과물이 지금 문 앞에 있었다.
화면 속 그림일 뿐이었던 앨범아트가 이제는 눈앞의 물질세계에 또렷이 존재하고 있었다. MP3로 음악을 듣던 과거의 서일과 그때의 이 음반은 동시대를 다른 장소에서 마주하고 있었겠지만, 어긋났던 두 존재는 지금에 와서야 교점을 이루어 한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지만, 추억이 얽힌 상징물은 다행히도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여 소유할 수 있었다. 컴퓨터에 CD를 넣고 들어본 음악은 여전히 서일의 감정을 어루만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