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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Nov 02. 2024

[영화] 12 Angry Men, 1957

편중되어 오판하지 않기 위한 토론

0. 들어가기에 앞서

<12 Angry Men(12인의 성난 사람들)>은 1957년 개봉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데뷔작으로, 살인 사건의 피고인으로 지목된 소년의 유죄 여부에 대해 12명의 배심원이 토론하는 과정을 그려낸 법정극이자 군상극이다. 제한된 조건과 환경에서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얼마나 흡인력 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교보재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하며, 아래에 이에 대한 감상을 남긴다.


1. 제한된 환경과 연출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하는 건물 외부 장면을 제외한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배심원실과 이에 딸린 화장실에서 벌어지며, 배심원장을 포함한 12명의 배심원들이 등장인물의 전부이다. 하필이면 날씨는 올여름 중 가장 더운 것으로 묘사되며, 선풍기가 고장 난 배심원실은 그들을 더욱 옥죄인다. 작품의 외부 구성적으로는 배경음악조차 일부 장면에만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환경은 일반적으로는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요소들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이나, 본 작품은 이를 마치 불필요한 부분을 마스킹하여 진정으로 중요한 부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장치처럼 활용해 냈다. 물론 이는 주요한 서사의 몰입과 배우들의 연기가 충분히 흡인력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덧. 장르는 다르나 본 작품의 특징이자 강점을 잘 계승해 낸 영화로는 2015년 개봉한 <맨 프럼 어스>가 있다.


2. 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판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본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된 사건은 소년의 유죄/무죄 여부에 대한 배심원들의 투표이며, 모든 배심원들의 의견이 합치될 때까지 배심원들은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증인이 명확했고 피고의 알리바이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배심원들은 큰 이견 없이 소년을 유죄로 투표하나, 그중 한 배심원(8번 배심원)은 무죄를 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8번 배심원을 필두로 하여 배심원들 간의 의견 교환과 반박, 언쟁이 시작된다. 보통의 추리, 법정 장르의 작품이었다면 8번 배심원은 작품의 주동 인물로서 가련하게 유죄를 선고받은 소년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부여받았겠지만, 작품은 8번 배심원에게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그는 사뭇 고요해 보였던 배심원실에 의심의 씨앗을 심고 그들의 고착된 편견을 끊어내는 역할을 수행해 낸다.


 8번 배심원은 처음부터 소년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오판을 내렸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자 무죄에 투표를 던졌다고 밝힌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9번 배심원이 이에 찬동하지만, 나머지 배심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의심의 틈을 벌려놓은 것이 8번 배심원이 준비한 칼이었다. 법정에서 소년은 범행 전 날 구매했던 칼을 잊어버렸다고 말했고, 그에게 칼을 판매한 상인은 그 칼이 굉장히 희귀한 칼이라고 밝혔다. 그랬기에 그 칼은 소년의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으나 그의 범죄를 입증하는 간접적인 물증이었는데, 그 증거물인 칼이 배심원실에 도착하자 8번 배심원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 칼과 동일한 칼을 꺼내 책상에 꽂으며 자신이 그 마을에 가서 동일한 칼을 구매해 왔다고 밝힌다. 이 시점 이후로 자명해 보였던 증거와 증인들의 맹점과 간과했던 부분들이 하나씩 드러나며 사람들은 유죄라고 믿었던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돌려놓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인물들의 경험(철길 주변에 살았던 인물의 소음에 대한 경험, 노인으로서 같은 노인이었던 증인의 심리를 추론한 9번 배심원, 증인의 집 평면도를 보며 구조를 설명하고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건축가(8번 배심원), 안경을 쓰고 있다가 코에 자국이 생긴 배심원, 과거의 자신이 본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  배심원)과 지나쳐버렸던 미심쩍은 부분들(노인의 걸음걸이, 안경을 쓴 자국이 있던 여성 증인의 모습)에 대해 재고(再顧)해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군상들의 특징이 작품의 백미 중 하나이다.


3. 과정에 집중하며

본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추론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렇기에 여기에는 8번 배심원이 오판을 내렸을 경우도 포함된다. 몇 차례 언쟁이 오고 간 후에 화장실에 간 8번 배심원에게 한 배심원은 자신의 의견이 틀렸고, 실제로는 유죄였던 소년이 그에 의해 무죄로 풀려날 경우에 대해서 언급한다. 언급 자체는 짧지만, 이 한 줄의 언급 덕택에 작품을 보는 관객의 자신의 견해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레 깊어지게 된다. 인명에 대한 존엄과 일종의 박애주의적 측면에서 8번 배심원에게 은연중 찬동하던 일부 관객은 이제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사회에 악인이 풀려나게 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해서도 일말의 가책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본 작품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소년이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배심원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며 서로의 논리와 입장을 파훼하는 데에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주동 인물을 정해 그 인물의 입장과 시선에 관객을 고정시켜 두는 것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용이하겠으나, 본 작품의 감독은 하나의 정해진 결론이 아닌 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열어놓고 관객의 시선과 견지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이와 같은 방식은 자칫 작품을 난잡하게 하거나 방향성을 흐트러뜨리기 쉽지만, 본 작품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혼돈을 잘 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4.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 사이의 대립구도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동 인물이자 화자는 8번 배심원이며, 이에 대비되는 반동 인물의 중심에 선 인물은 3번 배심원이다. 그는 작품의 막바지까지 소년의 유죄를 피력하며, "12 Angry Men"이라는 작품의 제목에 가장 잘 걸맞은, 화를 끝까지 표출하는 인물이다. 만약 3번 배심원이 없었다면 작품은 단순히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해석하는 복기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각 인물 사이의 갈등이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소년이 유죄임을 주장한다. 작품을 풀어나가는 열쇠이자 단초를 8번 배심원이 맡았다면, 3번 배심원은 배심원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될 수 있도록 하는 착화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비밀투표를 통해 유죄에서 무죄로 의견을 바꾼 것 같은 인물에게 찾아가 윽박을 지르기도 하며, 중반부 이후에는 억지를 부리며 논리적인 추론에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결국 후반부에는 그를 제외한 모두가 무죄를 선택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으려 했다. 작품의 마지막 순간, 3번 배심원이 무심코 내던진 지갑에서 자신과 아들의 사진이 나오는데,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사진을 찢지만 그와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져 내리고 무죄를 선택하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3번 배심원은 어린 시절 나약해 보였던 자신의 아들을 엄하게 대했고, 그런 과정에서 갈등이 지속되던 끝에 그의 아들은 자신을 폭행하고 집을 떠나 2년째 연락이 두절되었다. 마냥 포악하고 독선적으로만 보였던 3번 배심원의 이면엔 그 나름의 아픔이 있었다. 그는 작품의 필요악이자 갈등의 씨앗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그 또한 어느 면에서는 상처 입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끝까지 일관되게 유죄를 주장하다가 마지막 순간 아들의 사진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3번 배심원의 감정의 낙차가 작품의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였다. 이후 장면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외투를 건네는 8번 배심원의 모습으로 이어지는데, 이 장면을 통해 배심원들의 토론은 서로를 힐난하고 선악을 구분 짓기 위함이 아니라 보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합치의 과정이었음이 잘 드러나기도 했다.


5. 마무리하며

이미 몇 차례 봤지만 볼 때마다 몰입해서 보게 되는 작품이다. 인물의 구성과 성격, 대사와 역할을 구상하면서 정말 깊은 고민을 했음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대화 위주로 전개되는 영화에 거부감이 없다면 한 번쯤은 관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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