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지만 굳은 다짐의 메시지들.
처음으로 이상은이라는 가수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혹은 중학교) 때쯤 들었던 '비밀의 화원'이라는 노래였다. 맑고 청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헛헛함과 아련함이 느껴지는 그 묘한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덧. 섣부른 판단
저 무렵에는 가을방학, 브로콜리 너마저, 달콤한 소금, 캐스커, 짙은, 에피톤 프로젝트 등 인디 노래에 빠져있었다. 이상은이라는 가수도 언젠가부터 같은 범주로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었는데,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알고 나의 무지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격정적으로 삶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기보다는, 흘러가는 인생과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노래들이 좋았다. '삶은 여행', '언젠가는' 두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걸...
...
이젠 나에게 없는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이상은, 삶은 여행, 2007)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로
떠내려가는 건 한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이상은, 언젠가는, 1993)
본인의 삶에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삶과 자조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은 외형적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이상은의 가사도 단편적으로 보면 자조적 외침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무력감에 실망하면서도 나아갈 방향만큼은 잃지 않은 느낌을 준다.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에서는,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겠다는 내면의 다짐이 느껴진다. '언젠가는'에서는,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언젠가는 다시금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은연중이지만 굳은 믿음이 느껴진다.
같은 주장을 강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은연중에 암시적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상투적인 말처럼, 강렬한 메시지와 큰 목소리는 주장의 얼개의 탄탄함과는 별개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상대방의 공격이나 비난에 주눅 들지 않고 조곤조곤 주장을 이어나가는 것은 큰 목소리를 낼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위에서 소개한 두 노래가 딱 이런 느낌이다. 암시하는 메시지는 명징하지만, 이를 전하는 문장과 목소리는 섬세하고 부드럽다. 부드러움에서 오는 강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는 동양적인 느낌이 참 좋았다. 노래 자체도 동명의 고대가요이기도 하지만, 노래의 분위기 자체가 너무 좋아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악기의 사용도 다채로워서 한 번쯤 들어보시기를 추천한다.
님아 님아 내 님아 물을 건너가지 마오
님아 님아 내 님아 그예 물을 건너시네
아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아 가신님을 어이 할꼬
公無渡河(공무도하)
公竟渡河(공경도하)
墮河而死(타하이사)
當奈公何(당내공하)
(이상은, 공무도하가, 1995)
노래 분위기에 이끌렸던 또 하나의 노래는 'winter song'이다. '비밀의 화원'과 같은 앨범인 "신비체험"에 수록된 이 노래는 전반적으로 신비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이며, 'can you save...' 가사가 반복되며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노래가 계속될수록 점점 간절해지는 외침에 빠져드는 느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