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된 메모들.
2023.06.22
작고 어두운 밤 아래,
실눈 뜨고 바라본 누군가의 얼굴.
찰나에 스쳐간 슬픔.
찰나에 빚어진 외로움.
머물 수 없는 질문, 조용히 지켜낸 시간.
햇볕을 등지고 우리,
이대로 이렇게
-
비가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고 나무가 뿌리채로 흔들렸을 것이다. 아니 화창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제같은 오늘이라고, 오늘같은 내일이 올 거라고 자만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잘못이 있었다면 그런 꿈을 꿨던 것 뿐이다. 아니 그럴 것이다.
헛디딘 발 밑에 걸음은 미끄러졌고 기차는 어긋났다. 상상해본 적 없는 섬에 도달했다. 그 날은 비바람이 부는 날도 티없이 맑은 햇살이 가득한 날도 아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와 쌓인 하얀 눈이 섬을 뒤덮었다. 흩내리는 눈발은 다시금 발자국을 지우기를 반복했다. 무력하게 실패하는 나날들이 이어졌고 견뎌내야 하는 현실 앞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혼자 지내온 섬을 가까스레 떠나왔고 기차역 플랫폼에 두 발로 섰다. 겪어 낸 슬픔이, 기저에 낮게 깔린 외로움이 날 완성시켰다. 다시 눈이 내리는 날이다.
2023.06.24
만나보지 못한
겪어보지 못한
십여년 전쯤에 너를, 그때의 너를
혹은 지금의 너에게
닿고 싶을 뿐이야
-
이로운 말들로 곁을 내어주곤
소리 없이 흘러가는 밤공간.
안타까움이 뭔지도 모르고
늘어난 달의 가장자리를 잡아끌곤
진화되지 못한 오해의 새벽뿐
2023.06.25
마음엔 언제나 이해가 있었고 깨달아 알아듣고서야 마음이 존재했다. 돌아 오지 못한 질문은 십육그램에 지나지 않는 아이폰 속 메모장에 온점으로만 쌓였다. 청중 없는 질문에 혼자서 수 갈래의 대답을 반복, 어설프게나마 이해 해보려는 마음 혹은 욕심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그런 날들이었다. 좀처럼 종결되지 못한 질문은 나에게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로운 메모가 추가됐다. 너의 이야기가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될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 이야기에 닿고 싶다는 일념하에 정답지 찾기에 돌입했다. 그날도 그랬다. 어느 때에, 어느 곳에서, 어느 지점에서 여느 때보다 가벼운 손가락으로 왼쪽으로 스와이프를 하며 메모를 삭제했다. 남겨진 힌트를 찾은 하루 뒤엔 물음이 걷히기도, 추구한 이해 끝엔 오해가 생기는 역설도 있었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이해의 자리에 무지만 남겨두기로 했다. 언제든지 그 다름을,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 너의 이야기만 실감할 수 있도록.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영화에서 우연히 유사한 답을 찾았다. 마음엔 理解 대신 이해심과 믿음, 애정, 존중이 있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값진 마음에서야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에서야.
2023.06.30
탕! 출발 신호가 울리고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심장 박동 수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고 천천히 속도를 높여 간다.
늘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달리는 것이라 믿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고 성취감을 얻는 것이 그녀의 동기였다. 달리는 동안만 오로지 고통을 감내하면 되었다. 여전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세상과 함께 달렸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말로 다 못할 만족감을 안겨다 주었다.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고 옷깃에 바람이 스며드는 새도 느낄 수 없었지만 숨이 차오르는 느낌이, 땅을 딛고 달리는 발돋움이 그녀는 좋았다. 동시에 그녀는 팔과 다리를 스친 생채기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마지막 라인을 지나 도착지에 도달했을 땐 어쩐지 영광의 상처와 흉터 같은 것들이 그녀의 몸에 새겨졌다.
눈치채지 못한 바람처럼 금방 흔적이 지워질 거라 믿었던 날, 그녀는 본인의 한계를 훨씬 넘는 극한을 마주하고 나서야 트랙 위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동료로서, 딸로서, 친구로서의 압박을 고스란히 견뎌냈던 그녀의 뜀박질이 그제서야 멈췄다.
나는 그녀가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을 견디지 않았으면 한다. 두려움을 함께 마주했으면 한다. 함께 걸었으면 한다. 걷다가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뛰었으면 한다. 동이 트고 두 발로 모든 중력을 받아내며 걸어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길 바란다. 풀밭에 스쳐 상처가 생겨도 영광으로 남겨두지 않았으면 한다.
돌아보니 남기지 못한 발자국에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멈춘 자리에서 나와, 우리와 다시 두 발로 걸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끝이 없는 레이스를 걸음과 쉼의 반복으로 채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