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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12. 2016

ㄱ. 견우와 직녀 이야기

(5) 다시 만나러 갑니다

  "헉, "

 산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벌떡 일어났다. 자리가 축축했다. 아버지가 몸을 돌려 누우며 말했다.

  "자라. 다 큰 녀석이 꿈이나 꾸고."

 꿈이었을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밤은 고요했고 방에는 아버지의 고른 숨소리가 흘렀다. 하늘은 남색 빛이 어스름하게 번지고 있었다. 밤새 꿈을 꿨었나 보다.

  "아버지, "

  "왜."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 밤중에 어딜 나가."

  "바람 좀 쐬러. 금방 올게요."

  "밝으면 나가, 지금은 서늘해. 무슨 꿈을 꿨는데 그러냐?"

  "마을이 불타는 꿈이요."

  "더위 먹었나. 날이 더워서 그래. 길몽이야. 올해는 풍년이겠구나. 신경 쓰지 말고 어여 자라."

 옥신각신하다 결국 산은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 잠에서 덜 깼는지. 아무리 길몽이어도 그런 꿈은 꾸고 싶지 않았다. 도끼를 챙겨 들고 나섰다. 이왕 깬 것, 곧 있으면 해가 뜰 것 같았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산에서 하다 남은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꿈속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부분은 점점 흐릿해지는데 그 한 장면만 머리에 박혀 남아 있었다. 아, 솔. 혼인하면 안 된다는 누군가의 뜻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런 꿈을 꿨을까. 심지어 오늘이 칠석이었다. 머릿속이 그득 차서 딴생각을 하느라 발은 멈추는 법을 몰랐다. 부스럭, 저쪽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 뛰쳐나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깜짝 놀란 산은 휘청이다 곁의 나뭇가지를 움켜잡았다. 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발을 헛디뎠다.


  "뭐래요, 그래서 이리 온다는 게 참말이여?"

  "그렇다는데, 사람을 보낼 정도면 뭐, "

  "살다 살다 이런 일도 있네요. 여긴 워낙 꼴짝*이라, 참말로, 여기까지 기어 온대."

  "서두르세. 더 말할 것 없지. 그런데 왜 하필 오늘같이 신성한 날에."


 웅성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나려고 팔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온몸이 다 아팠다. 여기가 어딘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았다. 어렸을 때나 왔던 의원인데 여기 누워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이구 깼더냐."

 문이 열리며 의원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문틈으로 밖에서 사람들이 모여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산에서 구른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썩은 나뭇가지였나. 아버지가 낮은 절벽 밑에서 찾았다고 했다. 몸이 원체 튼튼해서 큰 문제도 없고 일찍 깨어났으니 징후가 좋다 했다. 대신 얌전히 걸어 다니는 것도 많이 봐줘서 할 수 있는 일이랬다. 한동안은 산에도 오르면 안 되고 달려도 안되고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이 칠석인데. 다시 솔이 떠올랐다.

  "예끼, 뭔 놈의 칠석이야. 딴짓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게다."

 아버지가 들어왔다. 토끼를 잡으러 다녀왔댔다. 토끼를 한동안 붙들고 늘어졌던 게 토끼 고기가 먹고 싶어서랬다고. 잘못짚었지만 그런 척했다. 나이 먹고 산에서 구른 게 자랑은 아니지마는 이것도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산은 슬쩍 칠석 얘기를 꺼냈다.

  "아직도 꿈꾸냐. 칠석은 무슨."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산은 어안이 벙벙했다. 입을 꾹 다물고 상처를 보던 아버지와 의원에게 좀 더 캐물었다.

 무슨 말인지. 들어도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다들 떠났다구요?"

  "발 빠른 집은 이미 다 갔지."

  "사또님은요? 왜 가요? 여기 의원님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저기 밖에도 사람들이 있는데?"

  "널 두고 어딜 가! 가기는, 사또님은 이미 중앙에 사람을 보냈다. 여긴 외침이 없어서 원체 관군이 적으니 원. 저들도 곧 떠날 사람들이야, 약 남은 것 좀 챙겨간다고 저러고 있는 거지."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충격이 컸다. 솔,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남은 사람들 중에 없으니 솔은 떠났을 것이었다. 제발, 조심해요. 꿈과 달리 사람들이 떠났다고 했으니 다행이지만서도 다행히 아니었다.

  "아버지는요?"

  "네 녀석 다리 나을 때꺼정 기다려야겠다. 여긴 들어오기가 힘들어서 시간이 좀 있을 게야. 다들 먹을 것을 좀 남겨두고 갔으니 여차저차 살겄지."

 그러니까 지금, 저 두세 고개 넘어 동네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무기를 든 무리가 이쪽으로 온다는 소문인지 소식인지가 문제였다. 도움이 오려면 또 시간이 걸리고, 도대체 어째서 왜 이때 다쳤을까. 아버지는 왜 이리 평온할까. 그 정도 움직일 순 있어요, 하다 한 대 쥐어박혔다.


  꼭 이리 하셔야겠습니까, 라는 말에 옥황상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찻잔이 달그락 거리며 놓였다. 한건 별로 없었다. 그저 꿈을 내리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렸을 뿐. 몇 번이고 삶을 새로 얻어도 둘은 서로를 알아봤다. 월하노인의 소행이거니 넘겨짚고 이번에는 그를 계속 곁에 두었는데, 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대의 실이 문제라고 생각했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업을 쌓았으니 그 벌을 달게 받아야 하거늘, 너무 달게 받고 있었다. 어차피 곧 보게 될 아이들이니. 옥황상제는 물거울을 휘 저어 맺힌 상을 지워버렸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의원의 솜씨인지 다친 몸은 유난히 빨리 나았고 그때까지 마을은 조용했다. 남은 이들은 나이가 아주 많아 거동이 불편하거나 혹시 모를 일에 대비를 하는, 무엇을 대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몇몇 관아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산이 회복했다는 것은 꽤 즐거운 소식이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 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바빴다.

 사람들은 윤 양반 댁 사랑에 모여 있었다. 가장 큰 집을 비우면서 마을에 남은 이들에게 맡긴 것이었다. 명분은 부탁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안전하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줄은 다 알았다. 여태 조용한 것을 보니 멀리 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리라, 이리 생각하고 지내고 있었다.

  물을 길어 오는데 관아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를 들었다. 가보니 도적들이 방향을 틀었다는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잘됐다, 했지만 그쪽은 솔이 갔다는 방향이었다. 대부분이 거기로 향했었다. 그 도적들보다 먼저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 일을 누가 해야 할는지, 하는 얘기가 나왔을 때 아버지가 옆구리를 쿡 쑤셨다. 산은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발이 날랜 사람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아무래도 위험하니 보장된 목숨을 들고 가기를 꺼려했던 터였다. 게다가 산만큼 산길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사람들은 반가워하며 그 결정에 찬성했다. 아버지는 물동이를 뺏어 들었다.

  "가야지, 뭐해."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 건강히 계세요."

 머뭇머뭇 어색하게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다. 주변에서 인사말, 고맙다는 말, 고생한다는 말들을 전하며 갈 때 먹을 말랭이들을 챙겨주었다. 아버지는 기다리마, 한마디만 했다. 산은 아버지와 신발을 바꿔 신고 곧장 길을 나섰다. 언제부턴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꼴짝*: 여기서는 매우 크고 깊은 산 외진 곳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마을은 꽤 커요.


[사진] 금강송이 멋진 솔산, 설악산




p.s. 대략 일주일 간 해외에 있을 예정입니다. 제 얘기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요, 기억이 추억으로 미화되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그나저나 이건 끝내고 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단편은 무슨 하하핳', 이게 요즘 드는 생각입니다. 돌아와서 마저 이야기를 만들고 간단한 후기와 ㄴ번째 이야기 소개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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